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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컬럼 (유양진 목사) -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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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21
  • 2018.11.09 05:36
요즈음은 한국감리교회의 목사안수 과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목사안수 받을 때는 그 과정이 매우 복잡했습니다. 우선 신학교를 졸업하면 반드시 단독목회(單獨牧會)를 해야 합니다. 서리(署理) 로 1년 과정을 거친 다음 준회원에 허입을 하게 됩니다. 매 해마다 준회원 1,2,3년급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마다 성경과 신학일반, 그리고 논문을 제출하면 논문심사를 통해 자격심사가 이뤄지고 그리고 윤리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지에 대한 성품통과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매우 까다롭게 진행됩니다. 
준회원 3년 급에서 논문과 자격심사를 거쳐 성품통과가 되면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목사안수 받고 2년 더 준회원 과정을 거친 뒤 준 4년 급에서 통과가 되면 정회원에 허입하게 되는데 정회원에 허입이 되면 ‘정회원 1년’ 급이 됩니다. 그로부터 정회원 10년 급이 될 때까지 매 해마다 성품통과를 거치게 되는데 정회원 10년 급이 통과되면 소위 ‘정 꼬리’가 떨어지게 됩니다. 정회원 된지 10년이 되면 총대(總會代表)가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목사안수 받고 정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같은 목사(정회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준회원 3년 급을 거치고 목사 안수 받는 과정에서 논문을 통과하고 자격심사를 받게 되었을 때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앞에 들어간 여자전도사님이 자격심사 위원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교인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그 여전도사님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저는 고락(苦樂)은 몰라도 생사(生死)는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자격심사위원은 보통 20여 명의 원로급 목사님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사를 똑바로 말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우리 같으면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떨결에라도 “예,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텐데 여자전도사님은 그 분의기에 당황하지 않고 똑 부러지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던 것입니다. 거의 40년 전의 일인데 그 여전도사님은 목사안수 받고 그동안 어떻게 목회를 했을까 정말 궁금해집니다. 그의 고백대로 생사는 몰라도 교인들과 고락은 같이 했는지...
커크 더글러스와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스팔타카스(Spartacus)’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스팔타카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노예 반란군이 로마 정규군을 상대로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을 다룬 영화입니다. 스팔타카스가 이끄는 노예부대는 막강한 로마군에 의해 진압 당하게 됩니다. 로마군으로선 스팔타카스를 색출해 내어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로마군으로선 그를 찾아 낼 길이 없었습니다. 로마군 사령관 크라수스는 스팔타카스를 넘겨주면 나머지는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을 땐 모두가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면서 선택을 하게 합니다.
이때 커크 더글러스가 “내가 스팔타카스요.”라면서 일어서는 순간 바로 옆에 있던 토니 커티스가 먼저 일어나서 “내가 스팔타카스요!”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노예가 “아니요. 내가 바로 스팔타카스요!” 그러자 저만치 있던 노예가 “아니요. 내가 스팔타카스요!” “아니요. 내가 바로 스팔타카스요!” 순식간에 포로로 억류된 모든 노예들이 일제히 일어서면서 “내가 바로 스팔타카스요!”라고 나서게 되자 진압군 사령관 크라수스는 힘으로는 노예들을 진압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굴욕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스팔타카스를 대신해서 죽어 줄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 잘 알려진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사석에서 강사목사님이 담임목사님에게 “이 교회는 목사님을 위해 죽어 줄 수 있는 교인들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목사님이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차 묻기를 “목사님은 이 교인들을 위해 죽어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40년 전 선배목사님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지금까지 내 마음 한켠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회할 때 “저는 목사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권사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주님을 위해 순교를 해야지 무슨 목사를 위해 순교합니까?” 이 사람은 제가 일생을 통해 목회하는 가운데 가장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죽을 각오하지 말고 목회에 걸림돌이나 되지 말았으면 좋을뻔한 교인이었습니다. 
‘이 교인들이 날 위해 죽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 교인들을 위해 죽어 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여전도사님처럼 단칼에 대답할 성질이 아님을 스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생각들이 때론 나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벌써 40년이 지나고 이제 이곳 휴스턴에서 마지막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에 시작된 베다니교회의 교인 수는 지극히 미약하지만 이들이 ‘최선’을 다해 교회를 위하는 모습을 볼 때 옛날의 질문들이 생각났습니다. 
사도바울은 “혹시 선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는지 몰라도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다”고 했습니다.(롬5:7-8)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 역시 주를 위하여 죽어줄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깨끗이 죽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양진목사
휴스턴 베다니교회
909-635-5515
yooy0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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