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녁,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딸 곁에 앉았습니다. 요즘 통 이야기를 못 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한두 마디 말을 건넸는데, 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Dad, sometimes I feel a bit bothered…” (아빠, 사실 가끔은 대화하자고 하는 게 좀 부담스러워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던 아이였습니다. 순간 저도 당황해서 이렇게 말해 버렸습니다. “I think it’s because we don’t talk as much as we used to.” (우리가 예전만큼 자주 얘기를 안 해서 그런 것 같네.)
딸아이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시간을 낸 것인데, 막상 그런 반응을 마주하니 솔직히 섭섭했습니다. ‘혹시 내가 우리 딸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걸까? Am I really bothering her?’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자녀가 스무 살을 넘기면 많은 아버지가 비슷한 자리에 섭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같은 말을 들으면 이제 다 컸구나 싶어 대견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내 역할이 끝났나 싶어 서운해집니다.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마디 더 보태려다 보면 대화는 거기서 끊기곤 합니다.
많은 아버지가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말을 안 할까?” 하고 답답해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모습의 아버지로 서 있었기에 아이가 말을 아끼게 되었을까?”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가정 사역을 해오면서 어린 자녀나 십대 청소년 자녀와의 소통에 대해서는 세미나도 많이 하고 온라인 강의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 자녀가 20대 청년이 되었을 때, 그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깊이 고민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 이제 20대가 된 자녀를 위한 말공부를 새로 시작해야겠구나.’ 그래서 어른이 된 자녀와 마음을 나누는 소통법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배운 몇 가지를 나누려 합니다.
1. 양육을 넘어 ‘동행’으로 가는 길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게 하실 때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집을 나가는 독립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정서적, 정신적, 영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부모와 ‘어른 대 어른’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성숙의 과정입니다.
심리학자 제프리 아넷(Jeffrey Arnett)은 20대를 ‘성인이행기(Emerging Adulthood)’라고 부릅니다. 청소년기는 지났지만 완전한 자립에는 이르지 못해서, 독립하고 싶은 마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함께 출렁이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와 거리를 두는 것은 아버지를 밀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세우기 위해 애쓰는 정당한 과정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자녀를 품에 안았던 손을 조금씩 풀고 자녀의 삶을 한 사람의 성인으로 존중하며 곁에서 함께 걸어주는 ‘동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침묵이라는 벽 뒤에 숨겨진 진심
20대 자녀의 마음에는 진로와 취업, 인간관계와 경제적 자립,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가득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사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을 드릴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큽니다. 그래서 자녀가 말을 아끼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서적 방어일 때가 많습니다.
목회상담가 폴 트립(Paul Tripp)은 위협하고, 보상을 내걸고, 수치심을 주어 자녀를 통제하려는 방식은 아이가 자랄수록 힘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는 통했을지 몰라도, 아버지만큼 커버린 성인 자녀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비난이나 지적을 오래 들어온 자녀는 그 불편함을 피하려고 아버지와 거리를 둡니다.
지금 자녀가 보이는 침묵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대화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가 늘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만 보이면, 사회라는 큰 벽 앞에서 위축된 자녀는 그 마음을 아버지에게 더 꺼내기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20대 시절 이야기를 솔직히 들려주십시오. 이렇게 말문을 열 수 있습니다. “아빠도 스물다섯 무렵엔 뭘 해야 할지 몰라 밤마다 불안했단다. 실수도 많이 하고, 이리저리 돌아가기도 참 많이 했어.” 아버지가 먼저 약함을 보일 때, 자녀도 자기의 고민과 실패를 털어놓을 용기를 얻습니다.
3. 마음의 문을 여는 세 가지 따뜻한 태도
첫째, 취업과 진로 고민 앞에 조언보다 ‘공감’이 먼저입니다.
자녀가 “아빠, 요즘 취업이 너무 안 돼요”, “회사 일이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고 싶어요”라고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러게 미리 준비하랬잖아”, “요즘 쉬운 일이 어디 있니? 다 참고 다니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면 대화는 바로 끊깁니다. 자녀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부모의 공감이 아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됩니다. 자녀가 세상의 냉정한 평가에 상처받고 돌아왔을 때, 아빠는 평가자가 아닌 ‘유일한 내 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둘째, 질문은 ‘점검’이 아닌 ‘초대’여야 하며, 조언은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취업 준비는 잘 돼 가니?”라는 질문은 자녀에게 성적표를 점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대신 “요즘 제일 신경 쓰이는 게 뭐니?”하고 물어 보세요. 아니면 그냥 “요즘 네 하루는 어때?” 하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자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조언을 하고 싶을 때는 “아빠 생각도 짧게 나눠봐도 될까?” 하고 먼저 물어보는 것이 자녀를 어른으로 존중하는 아빠의 모습입니다.
셋째, 인생의 결정권을 자녀에게 넘겨주고, 아빠는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전공 선택, 이직, 연애와 결혼 등 20대의 결정은 자녀가 스스로 내리고 책임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녀가 기대와 다른 길을 가더라도 비판하기보다 “네가 돌아올 집은 언제나 여기 있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빠가 보기에 너는 하나님이 주신 참 아름다운 재능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결정은 자녀가 하고, 아빠는 기도로 그 곁을 지켜주면 됩니다.
4. 아빠의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는 은혜의 시간
자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서운하다면, 잠시 내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을 흔들면 그 안에 있던 물이 흘러나오듯, 자녀를 향해 터져 나오는 서운함과 분노는 사실 내 마음에 있던 불안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서운함을 자녀에게 풀기 전에, 그 마음을 먼저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 보십시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자녀를 긍휼히 여기려는 아버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자녀입니다. 그 사랑을 먼저 맛본 아버지는 자녀 앞에서 여유롭게 설 수 있습니다.
형식을 갖춘 가정예배나 대화가 부담스러운 시기라면, 식탁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함께 밥을 먹다가 “이번 주에 감사했던 일 하나, 서로 위해 기도할 일 하나씩만 나눠볼까?” 하고 편안하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자녀가 원치 않으면 웃으며 넘어가는 것까지가 좋은 대화입니다.
오늘 저녁, 거창한 조언이나 훈계 대신 자녀의 마음을 두드리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면 어떨까요. “딸아, 아들아, 아빠는 언제든 네 이야기가 듣고 싶단다. 말하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오렴.”
하나님 안에서 어른 대 어른으로 깊어지고, 날마다 웃음과 은혜가 넘쳐나는 행복 명가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김성호 목사
(텍사스 기쁨의 교회 담임 / 휴스턴 바이블 칼리지 기독교 상담학 교수)
문의: 443-857-0129 | Joyfulpc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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