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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칼럼 독자기고

[폴윤의 중년 산책] 너무 빨라진 세상

koreanjournal by koreanjournal
7월 30, 2026
in 독자기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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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PaulYoon Column 073126

요즘 저녁을 먹고 나면 습관처럼 소파에 앉는다. 예전 같으면 리모컨부터 찾았겠지만, 이제는 손이 먼저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TV는 켜져 있어도 시선은 작은 화면에 머물러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참 많이도 변했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오십, 육십 대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빠른 변화를 온몸으로 지나온 세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를 책으로만 배운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달라지는 모습을 하루하루 살아내며 지켜본 사람들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선생님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하셨다.
“집에 TV 있는 사람?”
교실 여기저기에서 손이 듬성듬성 올라갔다. TV가 없는 집도 적지 않았다. 어렵게 TV가 있어도 대부분 흑백이었다. 저녁이 되면 동네 아이들이 TV 있는 집으로 하나둘 모여들곤 했다. 작은 방 안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숨죽여 화면을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화면 속 사람들은 모두 회색빛이었지만 우리는 조금도 심심하지 않았다. 웃을 때는 함께 웃고, 슬픈 장면에서는 함께 울었다. 화면에는 색이 없었지만 그 시절의 추억만큼은 지금도 선명한 빛깔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컬러 방송이 시작되었다. 처음 꽃이 붉다는 것을, 바다가 그렇게 푸르다는 것을 TV를 통해 다시 본 날의 놀라움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세상이 갑자기 한 뼘쯤 더 넓어진 것 같았다.
시간은 쉼 없이 흘렀다.
케이블 TV가 생기고 채널은 끝도 없이 늘어났다. 그때만 해도 세상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1학년 과학 시간, 선생님께서 애플 컴퓨터 한 대를 보여 주셨다. 학교에 단 한 대뿐인 귀한 물건이었다. 학생들은 신기한 보물을 보듯 컴퓨터 주위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그 작은 화면이 훗날 세상을 이렇게 바꿔 놓을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터넷이 찾아왔다. 멀리 있는 사람과 편지를 기다리지 않고 소식을 주고받고,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세상의 정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치 마법 같았다.
곧이어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타났다. 주머니 속 작은 기계 하나가 전화기이자 카메라가 되었고, 신문이 되었으며 은행이 되었고, 도서관이 되었다. 세상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미래가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AI가 찾아온 것이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글까지 써 준다. 살아오며 수많은 변화를 보았지만 이번 변화는 어쩐지 이전과는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낯설고, 설레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운 마음이 함께 찾아온다.
세상이 편리해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더 바빠졌다. 인터넷은 사람을 이어 주려고 태어났지만, 어느새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누구도 쉽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 본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젊은 부모님이 계시고, 교복 입은 친구들이 웃고 있다. 흑백 사진도 있고, 빛이 바랜 컬러 사진도 있다. 사진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데,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도 함께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때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이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고, 밥상머리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친구를 만나려면 약속 장소에서 기다려야 했고, 편지는 며칠을 달려야 도착했다. 모든 것이 조금 느렸지만 사람의 마음도 그만큼 천천히 흘렀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일부러 세상의 속도를 조금 늦춰 본다.

정치 뉴스 대신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고, 역사 이야기를 듣고, 음악을 틀어 놓는다. 책장을 넘기며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 세상에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이야기보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AI 다음에는 또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 알 수 없다. 언젠가는 지금의 젊은 세대도 우리처럼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가족을 기다리는 마음.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는 마음.
그것은 흑백 TV 앞에서도 있었고, 스마트폰과 AI가 함께하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을 더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오래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조금씩 배워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한가운데 서 있지만, 나는 이제 조금 천천히 걸어가려고 한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가끔은 뒤를 돌아보고, 오래된 추억 하나를 꺼내어 먼지를 털어 보고, 소중한 사람들과 오늘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요즘 들어서는 그런 시간이 무엇보다 귀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PaulYoon Column 2

폴윤(Paul Yoon Kirkley)
CEO, Broker, Houskor Realty and Management
28 대 휴스턴 한인회장 역임
2008년 한국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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