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미국에서 배운 것들
![[폴윤의 중년 산책] 아버지의 중고차와 할아버지의 맥주 한 병 1 PaulYoon Column 102326](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10/PaulYoon-Column-102326-1024x683.jpg)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도 오래전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떠올리게 된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는 생각나지 않아도, 사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의 햇살과 낡은 자동차의 기름 냄새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때는 참 힘들게 살았는데…….’
이런 말을 꺼내는 순간 나도 영락없는 꼰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이를 먹으니 자꾸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을. 우리 형제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혼혈아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는 어린 시절을 인천에서 보냈다. 그러다 십 대에 접어들 무렵,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1980년대의 미국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차이는 상당했다. 모든 것이 크고 풍요로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나라는 아니었다. 아시아인을 은근히 낮춰 보는 시선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동양인은 대개 우스꽝스러운 역할이거나 백인 주인공의 친한 친구 정도였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아시아인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미국 혼혈아였던 우리가 미국에 오니 이번에는 동양인의 얼굴을 가진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나라에 가든 완전히 그곳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형제는 미국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고등학교가 겨우 두 개 있는 동네였다. 나름대로 대도시인 인천에서 살다 온 우리에게 그곳은 너무나 조용하고 따분했다. 화려한 미국을 상상했던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와 한적한 들판, 그리고 해가 지면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듯한 작은 마을이었다. 혈기 왕성한 십 대 형제에게 그곳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었다. 당시 우리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야생마 같았다. 아버지와 부딪히는 일이 잦았고, 집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잔소리로 들렸고,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규칙과 책임은 귀찮은 것일 뿐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평생을 학자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감정 표현에도 절제가 있는, 어찌 보면 꼿꼿한 옛 선비 같은 분이었다. 반면 할아버지는 정반대였다. 호탕하고 자유분방하며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분이었다. 지금도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서부영화의 전설적인 배우 존 웨인(John Wayne)이 생각난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거침없는 웃음, 세상일에 크게 주눅 들지 않는 모습까지 꼭 그런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엄격한 아버지와 반항적인 두 손자 사이에서 늘 완충 역할을 해주셨다.
내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부르시더니 선물을 건네셨다. 당시 유명했던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 한 권과 와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당시 텍사스에서는 열여덟 살이면 합법적으로 술을 구입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손자의 성인식을 그런 식으로 축하해 주시는 할아버지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셨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아마도 길고 엄숙한 훈계가 이어졌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인생에는 공부와 규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자유도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우리를 마냥 응석받이로 키우신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가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셨다. 두 분은 우리가 가능한 한 완벽한 미국인으로 자라기를 원하셨다. 특히 할아버지는 우리가 미국에서 백인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지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인생이 훨씬 편해질 것이라고 믿으셨다.
그것이 우리 안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를 부정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들이 살아온 시대에는 백인 중심의 사회가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었고, 손자들이 그 안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미국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하나씩 가르쳐주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강가의 작은 별장이었다.
낚시를 좋아하시던 조부모님은 강가에 오래된 별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그 별장은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페인트칠부터 지붕 수리, 정화조 설치, 못질, 전기톱 사용법까지.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우리 형제를 데리고 가서 온갖 일을 시키셨다. 친구들과 놀아야 할 황금 같은 주말에 낡은 별장으로 끌려가 하루 종일 땀을 흘려야 했으니, 우리 형제의 불평은 끊이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막일하러 미국까지 왔나?”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투덜거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고맙게도 할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언제나 충분한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리고 가끔 맥주 한 병씩을 건네시곤 했다. 하루 종일 땀 흘린 뒤 마시던 그 차가운 맥주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단순히 낡은 별장을 고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할아버지는 망치질과 페인트칠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가르쳐주고 계셨다. 무언가 고장 나면 겁부터 먹지 말고 직접 들여다보는 습관,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고등학생이 된 우리 형제에게 자동차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자동차만 있으면 그 지루한 시골 마을을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차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한동안 생각하시더니 조건을 내거셨다. “너희 둘이 파트타임 일을 구해라. 그리고 자동차 보험료와 유지비를 스스로 낼 수 있다면 중고차 한 대를 사주마. 대신 둘이 함께 타고 다녀야 한다.”
우리 형제는 곧바로 일을 구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셨다.
우리의 첫 자동차는 당시에도 이미 십 년쯤 된 낡은 토요타였다. 새 차의 반짝이는 광택도, 멋진 디자인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차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자동차였다.
드디어 우리만의 바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차를 건네주시던 날, 아버지는 잊지 못할 말씀을 하셨다. “이제 너희는 평생 페이먼트를 내면서 살게 될 거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저 자동차가 생겼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아버지의 말씀은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자동차 할부금이 끝나면 집 모기지가 기다리고, 집 모기지를 내다보면 또 다른 청구서가 날아온다. 보험료, 세금, 각종 생활비까지. 우리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매달 페이먼트를 내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어쩌면 자동차 한 대를 통해 인생의 경제학을 가르쳐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웬만한 자동차 수리를 직접 하셨다. 오일 교환, 브레이크 교체, 트랜스미션 수리, 벨트 교환, 점화 시기 조정, 타이어 수리까지.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면 정비소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공구함을 여셨다.
그리고 우리 형제를 불러 옆에서 배우게 하셨다. 기름 묻은 손으로 부품을 붙잡고 있던 시간들. 무더운 여름날 자동차 밑에 누워 땀을 흘리던 기억들. 그때는 그저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훗날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대학 시절 나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수리 보조로 일하며 제법 괜찮은 아르바이트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억지로 배웠던 기술이 내 생활비를 벌어주는 능력이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전혀 다른 분들이었지만, 결국 같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손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 할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아버지는 인생을 감당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할아버지에게서는 자유를 배웠고, 아버지에게서는 책임을 배웠다. 그리고 두 분에게서 공통으로 배운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나도 그 시절 두 분의 나이를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자동차 오일을 직접 갈아보라고 하면 아마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 고장 난 물건을 고치기보다는 새것으로 바꾸는 일이 더 익숙한 세상이다.
물론 시대가 달라졌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 우리가 젊었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부담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우리 때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언가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세상에서, 그것을 얻기까지 흘려야 했던 땀의 가치마저 잊히는 것은 아닐까. 직접 고쳐보고, 실패해 보고,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하나씩 배워가는 경험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나이 든 사람의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믿는다. 쉽게 얻은 것보다 어렵게 얻은 것이 오래 기억되고, 누군가 대신 해결해 준 일보다 자신의 손으로 해결한 일이 더 큰 자신감을 남긴다는 것을.
가끔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 강가의 낡은 별장, 햇볕에 달궈진 지붕, 페인트가 묻은 작업복, 그리고 일을 마친 우리 형제에게 맥주 한 병을 건네시던 할아버지의 커다란 손. 또 한편에는 낡은 토요타의 보닛을 열어놓고 우리에게 자동차 부품 하나하나를 설명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우리를 고생시키시는지 몰랐다.
왜 남들처럼 편하게 살게 해주지 않으시는지 불평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두 분은 우리에게 단순히 기술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갈 힘을 길러주셨고, 세상이 언제나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셨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산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그 시절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시간들이, 이제는 돈을 주고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가장 그리운 시절이 되었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여전히 매달 페이먼트를 내며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낡은 토요타의 열쇠를 건네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리고 가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실 때면, 강가의 별장에서 호탕하게 웃으시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날의 맥주가 그토록 맛있었던 이유는 하루 종일 흘린 땀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한 병 속에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었고, 그 낡은 중고차에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고치고 있던 것은 낡은 별장과 자동차였지만, 정작 두 분이 만들어가고 계셨던 것은 우리 형제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폴윤의 중년 산책] 두 개의 얼굴로 살아온 인생 2 PaulYoon Column 2](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07/PaulYoon-Column-2-1024x888.jpg)
폴윤(Paul Yoon Kirkley)
CEO, Broker, Houskor Realty and Management
28 대 휴스턴 한인회장 역임
2008년 한국문학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