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는 늘 문제의 사람이 있다. 그러면 ‘용서와 정죄’라는 문제에 부딪친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용서하는가?
며칠 전 교회 장로 카톡방에 올린 글 입니다. 용서에 대한 글인데.. 공유합니다.
나의 생각대로 글이 나오진 않았지만?
글도 내 생각보다 또 다른 앞선 생각이 나를 끌고가고 있습니다.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입니다.
주인공 신애는 남편이 사고로 죽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정착하여 어린아들과 함께 새출발을 시작 합니다.
늘 엄마 신애와 숨바꼭질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 아들은 어느 날 영영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애의 모든 꿈인 아들은 유괴당하고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아들을 잃은 신애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 속에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며 살아갈 힘을 찾으며 노력합니다. 믿음이 자라고 교회의 출석이 잦아지면서 찬송도 부르며 기도를 드리며.. 드디어 슬픔을 지우려 하며 그녀는 용기를 내어 감옥에 있는 아들의 살해범을 만나러 갑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살인범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살인범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며 평온한 얼굴로 신애의 용서와는 무관한듯 말합니다.
신애는 울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했지만 나는 아직 아니다 라며 울부짖습니다.
나는 이렇게 괴롭고 힘든데 저 살인범은 저렇게 평온한지?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데?
신앙이 주는 구원의 개념과 인간의 감정과의 충돌인 것입니다. 용서란? 누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지? 인간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는 별개인지?
우리는 늘 신앙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고백도 해 봅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과연 하나님의 용서가 어떤 의미인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서요!” 유괴 살인범의 대사는 주인공 신애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는 과연 정의로운가? 묻고 있습니다.
신애의 독백 속에 ‘나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 줄 알았어요!’ 마지막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영역을 잘 모름니다.
그 깊이 높이 넓이를 어찌 알겠는지요?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는 어떤 개인이라도 상대에 따라 주관적이지 객관적은 아닌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용서할 맘이 없고 상처받은 마음이 그대로 있는데.. 이미 가해자인 상대는 용서받았다며 그 영혼이 자유롭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지?
그러면 하나님은 방법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먼저 관대하고 용서 손을 내민다는 것인지?
정말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신가? (물론 초신자의 질문일 수 있지만..) 그러면 믿음은 인간의 고통을 견디게하고 인내하며 더 깊은 상처 속으로 머물게 하는 것인지?
또 다른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함인가?
늘 부족한 나는 토기장이의 손길을 원망할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금그릇.. 은그릇.. 토기그릇은 만드는 주인의 맘인 것입니다. 왜? 나를 토기그릇으로 만들었냐며 반문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나의 그룻에 합당하게 사용된다면 만족하는 것입니다.
용서도 하나님의 몫일 것입니다. 다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판단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주인공 신애도 아마 나중에 중직자의 길에서 이미 신앙의 연륜 앞에 늙은 모세처럼 그렇게 변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도다.”
(시34 :18)
서울 사랑의 부부합창단 정진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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