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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칼럼 독자기고

[폴윤의 중년 산책] 세월은 참 이상하다.

koreanjournal by koreanjournal
9월 24, 2026
in 독자기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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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Yoon Column 092526

젊을 때는 하루가 왜 그렇게 길고 더디게 가던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빨리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울 속에는 흰머리가 하나둘 늘어나 있고, 이제는 “요즘 노래”라는 말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2차로 노래방에 간다. 예전처럼 번화가 노래방 간판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누군가의 집으로 향한다. 요즘은 집마다 작은 노래방 기계 하나쯤은 있으니, 커피 한 잔 내려놓고 마이크를 잡으면 그곳이 바로 우리만의 무대가 된다.
처음에는 다들 점잖게 앉아 있다가도, 한 사람 두 사람 노래를 시작하면 분위기는 금세 달라진다. 누군가는 박자를 놓치고, 누군가는 음정을 잃어버린다. 그래도 아무도 웃지 않는다. 아니, 웃더라도 비웃음이 아니라 정겨운 웃음이다. 우리 모두가 같은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늘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은 새 노래 좀 배워봐요. 맨날 옛날 노래만 부르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잔소리는 이어진다. 내 차에 저장된 노래 목록이 전부 오래된 곡들이라며 요즘 노래도 좀 들으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귀는 자꾸만 오래된 멜로디를 찾아간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노래일 뿐이겠지만, 내게는 그 노래들이 하나의 시간이고 기억이며, 잊고 살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작은 문 같은 것이다.

사실 내게는 2000년 이후에 나온 노래도 아직 신곡이다. 어떤 곡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는데 내 마음은 어느 순간 그 시절 어디쯤에 멈춰 서 있는 것 같다. 요즘 K-Pop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세련되어졌고, 춤과 무대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젊은 세대는 그 빠른 리듬과 화려한 비트를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하지만 중년의 나는 어느 순간 그 음악들을 듣고만 있게 된다. 좋기는 한데,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내려오지는 않는다. 아마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감동보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더 큰 위안을 얻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에게 옛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그 노래 안에는 그 시절의 거리와 계절, 사랑과 눈물, 청춘의 체온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몇 소절만 흘러나와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먼지처럼 날아오른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첫사랑이 떠오른다.
카세트테이프가 귀하던 시절, 좋아하는 노래를 라디오에서 기다렸다가 녹음 버튼을 누르던 기억. DJ의 목소리가 중간에 섞일까 봐 숨죽이며 타이밍을 맞추던 순간들. 그렇게 어렵게 완성한 테이프를 좋아하던 소녀에게 건네주던 날의 떨림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시절 우리는 사랑 하나에도 온 마음을 다했다.
지금처럼 메시지 하나 보내면 끝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전화 한 통을 하려 해도 가족 눈치를 봐야 했고, 만나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랑은 더 서툴렀고, 더 간절했고, 더 애틋했다.

가끔 그때 듣던 노래가 우연히 흘러나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소녀도 지금 어디선가 나처럼 세월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겠지.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처럼 흰머리가 늘어난 채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려온다.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옅고, 그리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감정. 아마 그것이 세월이 남기는 멜랑콜리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노래는 이별의 기억을 데리고 온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무너지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밤거리를 헤매던 젊은 날. 세상 끝난 듯 아파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아픔조차도 참 순수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걸었을까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간다. 젊음도, 설렘도, 빛나던 순간들도 조금씩 우리 곁을 떠난다. 하지만 대신 남겨주는 것도 있다. 추억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꾸 옛 노래를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노래 속에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계절인데도, 노래 한 곡이면 그 시절의 공기와 웃음소리, 그리고 가슴 뛰던 순간들까지 다시 살아난다. 어쩌면 우리는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나를 만나고, 잊고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계절을 잠시 걸어보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옛 노래를 부를 때면 나는 잠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 사랑에 서툴렀고 미래가 두려웠지만,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았던 청춘의 한가운데로 돌아간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가 멈추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무릎도 예전 같지 않고, 거울 속 머리카락에는 흰빛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괜찮다.
젊음은 떠났어도 그 시절의 추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의 얼굴에 주름을 남기지만, 추억은 마음속에 온기를 남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또다시 옛 노래를 고른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유행가일 뿐이겠지만, 내게는 한 시절의 인생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서게 되는 날에도, 아마 나는 가장 좋아했던 그 옛 노래 한 곡을 조용히 흥얼거릴 것이다. 그 노래를 따라 흘러가다 보면, 그리운 사람들과 그리운 계절들이 다시 한번 내 곁에 와 앉을 것만 같아서.
첫사랑의 수줍은 미소도, 친구들과 밤새 웃고 떠들던 골목길도, 어머니가 부엌에서 흥얼거리던 노랫가락도,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든 청춘의 한 장면처럼 다시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갔지만, 끝내 빼앗지 못한 것도 있다.
가슴속에 남아 있는 노래 한 곡. 그 노래가 있는 한, 내 청춘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오래된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노래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젊은 날의 나를 만나기 위해.

PaulYoon Column 2

폴윤(Paul Yoon Kirkley)
CEO, Broker, Houskor Realty and Management
28 대 휴스턴 한인회장 역임
2008년 한국문학 등단

Tags: 노래독자기고세대세월카세트테이프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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