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그 번제단 앞에 서있다. 금년은 발렌타인데이와 사순절이 겹쳤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이다. 재 가운데 앉거나 재를 머리에 얹고서 기도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 재는 머리위에 숯불의 영광이 타고 남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다시 영광을 만들기 위한 재의 행진 40일이 시작된 것이다. 40은 영적혁명의 숫자였다.
그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기도 제목을 하나 둘 싸들고 새벽안개를 가르며 교회당으로 간다. 새벽 자리를 채운다. 새벽무릎에 응답하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작정하고 올린다. 성경가방에 휴지를 넣고 사는 기도의 사람들이다. 그냥 기도하면서 울고 싶은 것이다. 단 한명이 있어도 이런 기도자는 세상의 어두움을 둘러 엎는다. 천만인에 둘러 싸여도 해를 받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를 좋아한다. 영적인 평안과 안정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도는 토탈 전투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적일 수 밖에 없다. 기도는 성령을 통해 성경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이 들어나고 기도에 확신의 불이 붙기 시작한다. 그 드러난 뜻을 임재라고 부른다.
침묵기도나 대화기도나 명상보다는 통성기도가 좋다. 다른 기도는 기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중단되기 쉽다. 불도 붙지 않았는데 요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안간힘을 쓰듯이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이 기도자의 간절함에 불을 붙이기가 더 쉽다. 기도는 생각이 아니고 머리를 쓰는 일도 아니다. 영에 휩싸이는 일이다. 그것이 가장 살아있고 기쁘고 온전한 기도다.
이스라엘이 사는 길도, 인생의 수렁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도 그 길이다. 이스라엘이 기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면 출현 그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인생도 그렇다. 순간을 사는 날 동안, 그림자처럼 있다가 없다가 하는 날 동안에 인생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기도의 시간을 더 가지라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탄은 기도를 빼앗아 가면 다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영물이다. 그것이 사탄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다. 기도를 빼앗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는 기도를 지키는 사람이다. 기도한다고 당장 집이 생기고 뭐랄까 안되는 일이 갑자기 되고 그런 것 아니다. 기도는 기도 그 자체로 위대하기 때문에 금덩어리 지키듯이 지킬 필요가 있다.
기도를 지키는 자를 파수꾼이라 부른다. 파수꾼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 간절함이 뭘까? 성읍의 평안이다. 성읍을 지키듯 기도를 지키는 자가 기도의 파수꾼이다. 사람을 보는 눈은 그것이다. 저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인가? 기도를 지키는 파수꾼인가? 이것이 기준이다. 사도들을 기억해 보면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따름으로 영이 오염되지 않았다. 기도를 놓치지 아니하는 파수꾼같았고 교회의 탄생도 그들의 기도의 결과에 기인했다.
40일을 달려야 하는 기도의 계절에 부활절의 새 아침을 준비하는 기도자들은 교회당에 앉아서 기도의 긴 순례를 시작한다. 믿음은 있으나 답이 없는 출발을 한것이다. 십자가를 본다. 인생 중에 재가되어 고해성사하듯이 살려달라고 그저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사무엘의 모친 한나와 같이 넋을 잃고 앉아 술취한 사람취급을 받으면서 눈물이 핑 도는 순간들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기도의 불이 붙는다. 불은 응답의 징조다. 불이 붙은 감화와 감동 속에서 이유없이 연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하늘과 땅을 이어가는 사닥다리를 오르고 내린다. 사탄은 현실의 왕이다. 사닥다리를 치워버린다. 하늘로 오르는 기도자의 길이 사라진다. 사탄의 일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사자에게 쫓기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며 마귀를 대적하라는 사도 야고보의 실천지침을 붙잡는다. 엘리야가 그 경우였다. 내린다는 비가 오지 않았을 때 엘리야의 기도는 하늘을 뚫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엘리야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나도 엘리야다! 성령은 야고보, 엘리야 지금의 교회, 그 누구와도 함께 한다. 야고보와 엘리야는 기도 중에 받은 말씀을 성경에 남겼고 우리는 그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오늘날 나에게 일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또한 글로 남길 수 있다.
남겨진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이다.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과 말씀을 받는 모든 방법은 기도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주 예수의 말씀안에 있다는 것과 사도들의 교훈안에 있다는 것과 지금 내가 기도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줄로 연결되는 삼겹줄이다. 이것이 주 예수의 말씀을 사는 방법인 것이다. 40일의 기도길에 참여할 이유가 충분해 진다.
그렇지 않은가? 주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의 말씀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주 예수의 레마타들은 모든 성경의 답안지였다. 그 답을 가지고 기록된 진리를 가지고 우리가 기도 중에 중얼 중얼 되내이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그 말씀이 내것이 된다. 내것이 된 말씀을 권능권세라고 부른다. 모든 존재들이 사는 길은 모두 권능과 권세에 달려 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기도의 때를 기다린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욤키푸르를 기다리는 것처럼, 품꾼이 주인의 삯을 기다리는 것 같이, 엘리야가 비를 기다린 것 같이 기도의 계절을 기다려온 사람들은 바쁜 세월 보내면서도 잃어버린 기도 제단을 쌓으려 성경 가방에 두루마리 휴지라도 담고 기도 자리로 나아간다. 기도할 제목이 적지 않은 것이다.
금년은 구정이 지나자 마자 사순절이 빨리 시작되었다. 이러다가 1월 1일과 사순절이 겹치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정초부터 기도회로 모여야 할 때가 온다면 동서양의 설이 같은 날이 올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때를 흘려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계절에는 누군가와 영혼의 수술대 위에 함께 올라 부활의 새 아침을 향해 가면서 노래할 수 있다. 서로서로가 점점 재가 된 모습들을 보다가 자신들이 다 타버린 재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우리의 눈길이 산을 향한다. 교회를 향한다. 예배당의 종탑을 지나 십자가 앞에 선다. 그리고 우리의 눈길이 맨 먼저 머무르는 곳은 주 예수의 가장 아름다운 갈보리 십자가가 된다. 그의 피는 우리의 영혼을 치유한다. 영혼의 수술을 공짜로 받는 일이다. 나는 매일 번제물이 된다.
다윗은 눈물 병에 눈물을 채우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메시야를 가장 많이 말했다. 전쟁보다 기도가 왕에게는 먼저였다. 왕이 무릎을 꿇는 경우는 거의 없다. 권력과 기도가 같이 가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을까? 물과 기름이다. 찾기 어렵다. 오늘날에는 그 눈물을 훔치며 기도하던 왕처럼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광경을 찾을 수가 없다.
침묵으로 기도하던 사람의 입이 열린다. 소리내서 기도하기 시작한다. 나 중심에서 이웃에게로 신앙이 옮겨간다. 이웃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 사귐을 통해 영적순례길에서 함께 동행자들이 된다. 40일의 기도길에서 사순절의 시간 속에서 기도많이 하다가 눈물 콧물 다 쏟다보면 녹슬었던 믿음의 통로가 정결케 될 수 있고 40일 후에, 기도하던 제자들에게로 부활체로 들어오시던 주 예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지 누가 알겠는가! 주 예수는 다시 오셔서 물었다. 평안하뇨? 마지막날 또 다시 오실 때는 나의 영이 들을 수 있도록 나의 이름을 부를 것 같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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