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노와 강권 그리고 전도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것이라고 주 예수는 말했다. 하늘나라 보다도 다른 것을 침략하는데 매우 호전적이었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는다. 세상은 지금도 그렇다. 종교는 주 예수의 침노를 막아서고 있었다. 율법의 역할을 오해한 것이다. 율법은 주 예수를 만나게 하려는 그림자다. 세례요한이 율법의 마지막사람이 된 이유가 그래서 그렇다. 주 예수와 관련성이 없는 모든 것은 전부 가짜다. 그래서 그 열심들은 모두 위선이고 죽은 열정이라고 불러도 된다.
이것이 주 예수를 반대하던 옛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율법만 있으면 된다는 율법주의가 그렇게도 소중했을까? 그렇다. 너무나도 소중했다. 율법의 사람들은 그거 없으면 죽었던 사람들이다.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율법을 도구로 삼아 세상의 높은 자리를 탐을 냈고 인생축복을 꿈꾸고 율법에 붙어서 호가호위를 했었다. 율법의 타락과 인생의 탐욕은 주 예수를 침노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주 예수가 오기 전까지만해도 율법의 힘은 세상의 전부였다. 율법을 아는 것이 사람사는 최고의 목적이었다.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주 예수가 왔어도 그런 흐름은 그대로 였다. 신약성경마저도 예수의 율법으로 만들어버렸던 율법주의는 성령과 따로 존재하면서 성령의 일을 반대하는데 앞장서 있었다. 타고난 열정과 일등 실력을 가진자들이 그 율법에 모두 목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 마저도 율법의 영역에 가두려 시도 했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정을 주 예수를 침노하는 열정으로 바꾸면 된다. 율법의 실체는 주 예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과 인생의 열심을 되살리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를 침노하게 하는 것이다. 그 침노의 목표는 주 예수의 십자가이다. 그러나 주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면 모든 열정은 진짜 열정으로 변화된다.
성경이 그 목표를 주 예수를 침노하는 것에 두었다. 그것이 모든 신앙의 해법이다. 성경의 모든 결론이 주 예수를 침노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성경은 그 방법을 이미 말했다. 주야로 묵상할것! 그리도 하나님께 돌아올 것!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것! 이런 표현들은 열정을 만드는 법칙이었다.
이제 주 예수와 함께 그렇게 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 예수의 말씀이 그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이 성전을 삼킬듯 했듯이 그렇게 주 예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침노라는 말로 표현 한 것이다.
사도들은 주 예수가 승천할 때 하늘을 주목했다.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를 주목했다. 스데반 집사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를 모두 주목했었다. 주목하느라 사람들의 눈들은 빠져나왔을 것 같다. 이제는 주목만 하지 말고, 광야에 놋뱀을 쳐다보듯이 거기서 끝나지만 말고 침노해서 주 예수를 차지하는 데에 초점을 두라는 말이다. 주 예수를 빼앗는 데 사용되어지는 열정이면 그 열정은 어떤 종류의 열정이라도 후회가 없게 된다. 열정은 주 예수를 침노하는데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의 천국은 침노되고 또한 강권되는 나라이다. 그러나 눈이 어둡고 귀가 열리지 않는 세상은 결승지점을 코앞에 남겨 두고 주저 앉고 만다. 주 예수께 눈을 열어라! 그들이 율법의 깃발을 들고 고지를 점령하려 올라 왔다가 주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고 모두가 도망을 간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이 그렇다
아! 우리가 달려온 길이 십자가 그 죽음의 길이 었었다니 이제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있는데 아들을 버리고 그들이 걸어왔던 은혜의 모든 길들, 그들이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아까워 십자가에 돌을 던지고 그 모든 열정을 포기하고 도망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공허와 허무이다.
모두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골고다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모든 허무를 하늘의 열정으로 바꾸는 현장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거기에 있다. 주 예수의 십자가가 그 문이다. 토탈 3일동안 바라보라고 했다. 그 문앞에서 기다리면 된다. 십자가의 흘린 보혈의 피 묻은 손이 버티는 나의 손을 붙잡고 골고다의 그 언덕으로 끌어 올린다. 함께 넘어가자는 이끄심이다. 이것이 침노하는 자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전환점이며 3일동안의 기적이다. 3일만의 기적은 아닌 것이다.
이 지점이 구원을 만든다, 이 지점이 삶을 바꾼다. 죄가 되었든, 허물이 되었든 어린날에, 젊은 날 무슨 일이 있었던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틀만 기다려라. 이틀은 죽을지 몰라도 삼일째는 반드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수요기도회가 생겨났었다. 그리고 한번 살면 영원히 살아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침노하는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보상이다.
율법자들은 여기서 도망갔다. 세상은 여기서 도망갔다. 넓은 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들의 일을 위해 미친듯이 살았던 사람들은 여기서 전부 무너졌다. 그것을 은혜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은 은혜가 아니였다. 내 마음 편하면 그것을 평안이라고 불렀다. 십자가 앞에서 모두 내려놓아야했던 것들이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 이것이 침노하는 자들이 얻을 수 있는 승리다. 그래서 주 예수는 이제는 딴생각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라고 침노하라는 극단적 언어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주 예수께서 급하셨다.
주 예수가 또 말한다. 이제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집을 채우라. 도망간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집을 채우라. 벌떼처럼 모여서 기도하면서 한마음이 되고 한뜻이 되어 함께 교회를 만들어 가라는 뜻이다. 옛사람들이 돌아오도록 손을 잡고 끌어당기고 새 사람들이 나아오도록 교회를 전면적으로 성령의 교회로 리모델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합력하여 선을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내집은 성령의 말씀의 집이라고 했다.
교회 마당에 잔치를 연다. 모든 족속이 함께온다. 교회당 안에서 자기들의 언어로 부활과 생명의 말씀을 배부르게 나누어 먹고, 그리고 모든 침노와 강권의 사람들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한 상에 둘러앉아 떡을 떼기 시작할 때, 그 영생의 강물이 온 세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침노를 배운사람은 강권을 배우게 된다. 이것을 전도라고 불렀다.
전도를 생각한다. 침노하고 강권하고 사는것 이것이 인생살이다. 40일을 지나 사순절을 품고 부활의 아침을 잉태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전도된 사람이 재산이고 면류관이다. 전도는 미련하면서도 가장 감격스런 일이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지 않게 한다. 모든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모든 미움과 증오와 불의와 싸우게 한다. 셀마, 알라바마, 페터스다리, 로사팍, 마틴루터 킹, 워싱턴 DC 의 꿈의 연설, 존 에프 케네디의 결단, 그리고, 암살, 베트남전쟁 등등의 시대는 도망가지 않는 사람들의 용기있는 희생이었다. 그들은 젊은날 생을 마감했었다.
전도는 그렇게 예수를 사는 일이다. 교회를 준다. 생명을 준다. 거듭남을 준다. 십자가를 준다. 성령을 준다. 기다림을 준다. 간증을 준다. 다 주어서 사탄의 나라를 끊게 한다. 전도는 숨넘어가면서도 하는 일이다. 전도는 실패가 없다. 전도는 믿음을 보이는 일이고 전도는 천국의 모든 상급을 다 가지고 있다. 사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사망아 네가 어디있느냐? 부활의 아침이 오고 있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폴윤의 중년 산책] 내 인생이라는 한 편의 영화 2 [폴윤의 중년 산책] 내 인생이라는 한 편의 영화](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08/PaulYoon-Column-081426-360x180.jpg)



![[영상]이 대통령 "개헌 위해 필요하면 임기 단축 수용" 6 [영상]이 대통령 “개헌 위해 필요하면 임기 단축 수용”](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08/video-0815-120x8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