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생의 주제가 될 수 있겠다. 생각은 깊게 여행은 넓게! 성경의 주제가 공의라면 세상의 주제는 정의다. 정의는 실패하고 공의는 실패하지 않는다. 공의가 인생의 작은 눈에는 실패한 것 처럼 보일뿐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믿음의 시각안에서만 가능하다.
천재지변에는 정의가 없다. 하나님의 공의만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의가 없는 것이다. 천재지변과 전쟁으로 마을이 없어지기도 하고 인생의 모든 일들에 수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정의는 없다.정의가 없는 세상에 언제나 공의가 개입했었다.
인생은 계속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당하기만 했던 존재였다. 홍수 앞에서 당했다. 바벨탑을 쌓다가 당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다가 완전히 망할 뻔 했다. 여기서 정의가 어디 있는가를 물을 필요는 없다. 정의라면 홍수가 없어야 되고 바벨탑을 쌓도록 그대로 두어야 하고 우상도 허락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있었다. 공의가 오기위한 예고였으니까.
이들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되려는 오만이 문제 였다. 인생이 있어야 될 자리를 포기했을때 인류에게는 예외없이 재앙이 있었고 그때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하나님 왜그러셨냐고 하소연을 한다. 늦었다. 공의는 이미 깨어졌기 때문이다. 계약이 파기된 것이다. 깨진 공의아래에는 답이 없는 정의만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공의는 ‘하나님의 공의’임으로 처음부터 넘보지를 말았어야 했다. 천사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면 타락한 천사요 멸망의 천사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루시퍼다. 사람들이 굳이 하나님이 되려고 얼마나 역사 속에서 낑얼대는지를 모른다. 왕이 꿈한번 잘못 꾸어도 제국이 사라지는 일이 성경에는 흔하게 있었다. 그것을 인류는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교훈을 삼고 산다.
그 교훈은 하나다.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지혜요 순종이라고 성경은 쓰고 있다. 최고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불쌍한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인생의 욕망에 이것을 집어넣는 일을 한다. 오히려 최고는 하나님 한분뿐이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인은 연약하고 부족한 중에도 최고의 실패자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일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나님되려고 하는 인생의 태도를 성경은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 자기 잘난맛에 산다는 뜻이다.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고 비추기 위해서 산다. 이것은 자신이 옳고 자신이 기준이 된다는 말이외에 무엇이랴. 공의의 하나님은 자기 의를 가장 미워한다. 자기 의는 우상과 같은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자기 의가 가장 쎈 성경의 대표선수다. 요나도 그렜고 야곱도 거의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자기 의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교만이라는 말과 자기 의라는 말은 동의어다. 교만과 마귀는 붙어 다닌다.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방법은 자기 의에서 결국 빠져 나오는 방법을 아는 데있다.
공의의 하나님은 사랑을 공의를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 공의는 하나님 자신의 방식으로 행하신다. 홍수도 공의다. 가난과 포로와 억압도 모두 공의다. 공의는 만사가 하나님의 뜻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욥이 흔들리고 분노했던것은 공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모든 초점을 두고 만사를 해석했고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 내가 하나님앞에서 뭘 잘못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트집을 잡았었다.
그럴만도 했다. 사실 욥은 마치 바울처럼 율법에 아무 흠이 없이 살았던 매우 드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재판장이기도 했고 율법에 능한자이기도 했다. 십계명에 대해서 그 어떤 헛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의인이었다. 그러나 고난은 그 모든 의를 모두 쓸모없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로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모르면 바보고 알면 하나님의 것을 훔친 날강도짓을 한것이 된다. 이것이 모든 고난의 원인이었고 이것을 풀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것이다. 공의를 풀어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창조의 비밀과 말씀에 대한 해석에 있었다
욥은 창조세계의 신비한 일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늘과 바다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모를 정도였다. 인생은 조금 알았을 수 있다. 그러니 욥은 고난을 피할 수 없으면서 그냥 앉아 있는 시체였던것. 굴러 다니는 돌들에 불과했다. 그의 행위와 그의 구제와 선행도 아무런 공적이 안된 것이다. 허무와 공허다. 의미없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행했던 율법이 사람들 위에 군림시키는 논쟁의 주제들에 불과 했었다. 답이 없는 논쟁의 끝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았더라면 그 현실은 그 자체로 죽음이었다. 피골이 상접되었고 피부에는 종기들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인생 속에서 무슨 희망을 볼 수 있었을까? 자기 의가 하나님의 공의로 변화되는 길 이외에는 해답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시작이다. 이것이 고난의 힘이다. 고난은 하나님이 나타나게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고난의 폭풍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때가 하나님의 공의의 때이다. 이것 아니면 인생의 자기 자랑은 해소될 방법이 없다. 자기 의의 헛점이다
하나님의 욥사랑이 시작된 것은 창조신비와 말씀의 의미를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드러내 보이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욥은 창조의 비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바로 대답했다. 나는 무지한 말로 생각이 스스로 어두워졌으며 나도 모르는 말을 앵무새처럼 떠들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묻지도 않으면서 귀로 들은 이야기로 살았음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회개 앞에서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새 일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이전 일은 묻지 않으신다. 욥의 장래가 구만리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타임라인안에 욥을 불러들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다. 여기에 홍수가 또 온들 여기에 소돔과 고모라성 같은 불이 있든 그것은 아무 힘이 없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의 창조의 공의를 이해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한다. 율법의 의는 언제나 자기 의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볼때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욥이 다 잃었을때, 소유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오히려 비워지면 채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욥은 하나님을 양면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창조의 신비를 통해서 다른 면에서는 말씀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인생을 사랑하고 살리기로 작정하고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수술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따른다. 이후에는 축복만이 욥을 뒤따르게 된다.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제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묻는다. 대답은 이렇다. 여행하라! 그리고 생각하라! 여행은 창조의 신비를 보는 놀라운 외적인 경외이다. 작게도 보고 크게도 본다. 작다는 것은 뿌리를 보는 것이고 크게는 그 열매를 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생각하라! 이것은 손에 있는 핸드폰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과 인생과 창조의 세계를 통합해 나가며 살아가라는 뜻이 된다. 욥기는 이 일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 진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의 책이다. 공의는 정의와 다르고 또한 자기 의를 끝나게 한다. 이것 말고 인생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까? 모든 인생의 일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오늘이 기회다. 기회가 올때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내일은 할렐루야 아멘이다. 교회는 매주 이런 말씀을 나눈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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