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가고 있다. 여기 저기 축하 풍선들이 떠 올랐고 수많은 꽃다발들로 5월을 많이 웃었다. 모든 기쁨과 혹은 슬픔도 다 주의 은혜 였음을 안다. 계절의 여왕도 무대에서 내려갔다. 이 계절들의 중심에는 부활의 절기가 있었다. 부활은 계속된다. 아직도 솥에 펄펄끓는 채로 남아있다.
사순절의 날들과 부활의 여러 주일을 지나면서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묻어둔다.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절기를 또 따라가는 이들이 우리들이다. 주를 다시 앙망한다. 다시 말씀앞으로! 다시 성전의 지성소로 향한다. 이 아름다운 발걸음들을 주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대답이라고 불러도 된다. 이 모든 신앙의 기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안내를 받는 것이다. 모든 세계교회가 하나님의 성령 시즌에 붙들려 가고 있다.
교회가 태어났다. 태어난 교회의 주인은 성령이다. 성령은 교회의 생일을 알렸다. 교회는 성령과 함께 땅끝까지 뻗어 가야 했다. 이것이 초점이다. 성령은 교회의 원동력이었고 기도는 성령충만을 받게했던 제자들의 믿음의 행동이었다.
부활과 성령, 성령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를 규정하는 최고의 언어들이다. 이 언어들은 너무나도 작아 들리지도 않고 하나님이 우레 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개척자이면서 위로자다. 이들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세워가고 있다. 부활없는 성령은 없고 성령없는 부활도 없는 셈이다. 성령은 말씀의 부활을 창조하는 영!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령은 부활한 백성들의 영혼과 같이 활동한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부활을 쓰는 큰 손이었다. 부활을 가장 정교하게 기록한 사도였다. 그는 주 예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과 교회의 부활과 오늘날의 부활을 하나로 연결한 성령의 사람이었다. 천국의 천재였고 부활의 전문가 였다는 말이다. 부활에 대해서는 바울말고는 물을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부활이 없이는 그의 모든 편지는 가짜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부활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의 부활이야기는 고린도전서 15장에 잘 씌여져 있다. 이 글을 성령의 안내를 받으며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다. 바울은 부활을 죽은자의 부활과 산자의 부활과 모두의 부활을 말했다. 한마디로 믿음의 부활을 말했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이해의 첫 번째 열쇠다.
믿음이 없이 죽거나 사는 것은 부활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구원을 말하는 교회가 성령의 배에 오를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잊어서는 안된다. 즉, 이것이 교회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포인트라는 말이다. 좀 어려울 수도 있다!
베드로와 바울이 부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들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로 부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부활의 핵심어는 하루다. 성령과 함께 살아있는 하루를 부활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이다.
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고 바울은 말했다. 소망도 없고 죄사함도 없었다. 그러니 모두가 죽고 살지 못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종교만 난무하고 이성과 감정과 르네쌍스와 인생의 계절 이외에 ‘삶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물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끔찍하고 처절하다.
중요한 것을 놓칠 때 무엇을 하고 왜 살았는지를 후회하게 될 날들이 급하게 온다. 그래서 우리는 무덤에서 통곡한다. 그리고 또다시 무지게 빛같은 세상의 환상들과 믿음을 거래하고 썩지 않을 몸을 입은 사람들이 썩음에 묻혀서 갈피를 못 잡고 만다. 말도 아니다.
그래서 이 시즌에 성령을 말해야 하고 성령을 가르쳐야 교회의 반열에 낄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을 말한다. 말로 하지 못하는 일이 성령이다. 그것은 순간 순간 나와 너와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인생의 어떠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령에 대해서 이 정도로 덮고 다만 믿음은 성령에 의해서 작동된다는 작은 결론을 붙잡고 넘어가려는 것이다.
기도는 성령이 우리 몸을 열고 들어올 때 알아차리는 성령을 캡쳐하는 기술이다. 영감을 소유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다. 방패다. 반석이고 요새다. 성령을 실직하게 만드는 일은 기도를 쉬고 기도와 관계없이 일상을 사는 평범한 습관이다. 이것을 무너짐이라고 했다. 성령을 멈추게 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이 일이 중단되면 사람은 악인, 죄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부활한 주 예수를 믿었다. 그리고 지금도 성도의 최고의 꿈은 그 몸처럼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 몸은 생명과 성령의 말씀을 들을 때 만들어 진다. 소위 속사람이다. 사람의 외모가 겉모습이고 속모습은 생각이듯이 성경의 겉사람은 율법이고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쉽게 말하면 내안에 들어온 말씀을 속사람이라고 말한다. 생명은 하나다. 이 생명이 영혼의 주인인데 이 영혼이 자라지 못하면 사자나 호랑이 새끼로 끝나고 만다.
몸은 자라야 한다. 영적인 몸이 자랄 때 온 천지의 피조물도 협력을 시작한다. 천상 천하의 모든 만물들에게 외면 당하는 인간을 본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알 수도 없다. 다만 한가지 아는 것은 성령의 몸이 되어감에 따라 그 몸들도 아름답고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가치가 똑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말씀이 나오는 곳이다. 부활한 그 몸과 같이 되기 위한 푯대를 분명히 하고 공동체가 자라갈 때를 영육간에 그리고 교회와 세상의 관계들도 모두 건강하게 된다는 말이다. 주 예수의 말을 들어보자.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가 그말이다. 먼저 살고 볼일이다.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다. 듣지 못한 기갈일 뿐이다. 이것이 아모스의 외침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것은 나라가 곧 멸망하는 환상을 보았을 때 하박국이 듣고 외친 말씀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선지자의 결단을 말했었다. 이런 일들이 주 예수의 몸이 되려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닥칠날이 온다. 믿음이 그 대답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잘 듣는 일이다. 들을 곳을 찾는 이들이 믿음의 사람들의 할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다니엘의 말이었다.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듣는 일이 믿음이다.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어느날 믿음이 뚫리고 어느날 인생만사가 무력해지고 허무해지는 날이 갑자기 찾아온다. 믿음이 온것이고 살아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부활의 대장으로서 바울은 교회를 처음 접한 로마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했다는 자칭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완성도 있게 말했다. 세상과 선을 그은 것이다. 원수를 잡아 골짜기에 버린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전하지 아니하면 누가 들으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말씀을 듣고자 교회로 회당으로 성당으로 가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리고 부활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다. 인생과 성경과 모든 문제를 푸는 성령의 신비가 들음에서 온다. 모든 만물이 이 시즌의 흐름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절기 따라 세월 따라가면서 성령을 따라가자는 뜻이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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