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쓸 때가 있고 모자를 벗을 때가 있다. 전쟁이나 관복을 입을 때는 모자를 썼다. 그러나 예를 갖추거나 자유를 말하고자 할 때는 모자를 벗었다. 모자는 쓰나 벗으나 자유를 상징한다.
광복절은 자유를 말한다. 문자 그대로 광복이 다시 빛을 회복했다는 뜻이라면 36년의 일제의 검은 구름이 걷힌 날이 그 해 8월15일이다. 그 날은 국내외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온 겨레가 다시 모여서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것을 선언한 날이다. 날짜를 바꾸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곡가 정인보는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말을 남겼다. 온 나라는 모자를 하늘로 벗어 날리던 졸업식장처럼 모든 계층과 계급과 억압을 벗어던지며 자유를 말했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다가 없다. 그저 자유면 되었다. 모자는 벗기 위해서 쓴다. 벗으면 자유다.
파리올림픽 마스코트는 빨간 모자이다. 이 모자는 불란서혁명 때 시민군들이 쓰던 모자를 의인화해서 제작되었고 자유를 상징하는 프라주라는 이름을 가진 모자라고 했다. 빨간 모자를 쓴 시민군들은 모든 체제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항거했다고 했다. 미국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유대인들의 모자는 조그마한 키파다. 언제든지 쓰고 다닌다. 이모자는 하나님의 모자다. 적어도 이 모자는 하나님과 연관을 갖는다. 위에 계시는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준 그 날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언제든지 위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자유는 거기서 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잊는 자유는 그것은 빼앗긴 자유이고 가짜 자유라는 것에 이의가 있을까?
머리에 조그마한 키파를 쓰고 세상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그들의 머리 위에서 자유와 주 예수를 향한 역사를 읽는다. 3500년 전에, 그대로 살다 죽어도 되는 노예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홍해를 열어서 건너게 했던 자유다. 그 자유는 다시는 세상의 억눌음 아래있는 자유를 거부하라는 말이다. 그 자유의 다른 이름이 예배였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마라! 제1계명은 모든 자유의 원천이었고, 하나님의 진정을 표현한 하나님의 친필이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라고 했다. 야훼는 권력자가 아니다. 야훼는 악에게는 강하고 선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악도 회개하면 녹아진다.
그 하나님의 양쪽에는 사랑과 공의의 천사가 호위한다. 사랑은 먼지 같고 아침 안개 같은 인생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긍휼이다. 이 긍휼이 없었다면 어떤 인생도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이것은 마치 공기와 같고 바람과 같고 해와 같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공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의다.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과 인생의 균형추를 맞추는 재판의 저울추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법의 차원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경륜과 지혜에서 나온 공의인데, 그것이 십계명이다. 그러므로 공의는 십계명을 듣고 행하는 데 있다. 다른 공의는 들어서 해방은 되나 삶의 능력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의 찰나적인 공의라고 말한다.
십계명은 노예들도 왕들도 예언자들도 주 예수도 사도들도 교회도 온 세상이 모두 지켜야 될 하나님의 법이다. 그 법의 전능성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에 두었으며 그 법의 진리는 듣고 행하는 중에 나타나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있다.
이 원리와 흐름을 타는 것을 성경은 계속 복이라고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악인의 꾀에 속지 않으려면 죄인의 길에서 나오려면 그리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십계명중에 제1계명만 붙들면 된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주야로 묵상하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말씀을 입에 머금고 말씀의 단맛을 맛보며 잠자리에 들어간다. 이것이 악몽을 만나면 악몽은 산산 조각이 날 것이며 이것이 사람들을 더욱더 기도의 현장으로 몰고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기도할 때도 다른 신을 내 앞에 두지말라를 주문 외우듯이 되내이며 곱씹고 성령안에서 밀어 붙이면 주 예수의 원수이면서 성도들의 대적자인 사단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물러간다고 했다.
영적전쟁은 단 하나의 신과 다른 신들과의 전쟁이며 성령과 악령들의 전쟁이며 영과 진리의 참된 예배와 이성과 지식들의 거짓 예배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도록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현실 앞에서 성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극히 제한적인 것밖에 주신 일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제한적인 것은 오직 기도뿐이다. 유대인들처럼 어디에서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도의 키파를 쓰고 자유의 모자를 쓰고 기도의 두루마리를 덮어쓰고 제1계명을 붙들고 나아가는 예배는 그들을 오늘날 유대인들이 되게 했다. 전부 기도와 찬양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드리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첫 번째 일이다. 기도는 사람들의 배후에 숨어 대장 노릇하는 악마를 넘어뜨리는 일이다. 세상과 현실은 너무도 많은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여호와! 오직 예수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산다. 사람들의 성공과 출세는 언제든지 아담의 콤플랙스에 걸려들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과 같다.
누가 성경을 덮게 하는가? 말씀을 이루시고 십계명을 성취하신 주 예수의 십자가를 자꾸 건너 뛸려는 신앙의 세계는 음부의 세계며 이단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제1계명을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다른 신을, 다른 성경을 또 하나 만들어서 또 하나의 다른 종교를 만들려는 마약에 다름 아닌것 이다.
모자를 벗어던지며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유는 조건적 자유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면류관을 벗어서 주 앞에 드릴 때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자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유이다. 멍에를 매어야 따라가는 자유다.
세상이 만든 법조문의 해방이나 양심의 자유나 그런 류의 자유가 아니다. 언제든지 바꾸고 수정하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고 권력의 흐름에 따라 뒤바뀌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십계명의 자유는 그래서 천국에서도 통한다.
36년의 일제의 시간이 있었다. 400년의 애굽의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70년의 바벨론의 시간도 있었다. 이 시간들이 불행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제 성도의 시간은 영원과 연결된 자유의 시간이다. 믿음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과 연결을 지으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것은 이 땅 현실에 내려온 모든 영원한 것을 말한다. 성도는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 왔는지 모른다.(히11장)
이제 구원의 모자를 쓰자. 그것을 바울은 투구라고 했다. 영적전쟁을 하기 위해 쓰는 구원의 모자라고 했다. 구원의 투구 안에는 온전하고 거룩한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걸어다니는 성전이고 교회라면 그 머리가 성도를 인생의 운동장에서 구원과 영광의 길로 이끈다. 이 길은 혼자 가는 길이어서는 안되고 둘 이상이 함께 가면 좋다. 프라쥬는 혁명을 위해 필요할 때 쓰는 자유이다. 삿갓은 방랑의 자유이다. 키파는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그러나 구원의 투구는 언제나 쓰고 사는 믿음의 자유이다. 모자를 벗어 던질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 날까지만 쓰고 살자.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토요와이드] 이 대통령, 美빅테크 CEO 회동…여야 내홍 격화 6 [토요와이드] 이 대통령, 美빅테크 CEO 회동…여야 내홍 격화](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07/Lee-0725-120x8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