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는 상식을 이기지 못하고 상식은 국민의 뜻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어서 상식을 이기지 못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모든 것을 잃은 과부의 탄원이 받아들여진 것을 말했다.
그리고 주 예수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여운을 남겼다. 믿음 찾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 같다. 사법부가 불의에 장악되면 국민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것이 상식이다. 상식적인 국민들의 마음이 화가 많이 나있다. 한나라의 존재의 뿌리를 건들었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상식에 맞게하고 진리아래서 순종하면 된다.
시작은 반이지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으면 더 좋다. 젊은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완성을 향해 질주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다.
성경은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뒤로 갈수록 더욱 더 좋아지는 나라를 보여 준다. 첫사람 아담의 유전자는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 죄의 유전자였다. 죄는 퍼지는 속도가 문자 그대로 급속도로다. 노아 시대를 넘기지 못하고 몹쓸 세상을 물로 싹쓸어 버린 하나님을 기억해야한다. 예수는 세상 끝날을 노아의 일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언제든지 반복되었었다.
이 비극을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번째 아담을 세상에 보냈다. 다시 모두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긍휼이 발동되었고 그리고 때가 찼고 그 때에 맞추어진 날에 메시야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구세주로 오셨다. 주 예수 세상 계실 때는 죄악이 절정에 달했었다. 노아의 시대와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유종의 미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가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시골 마을에 결혼축제는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었고 포도주 역시도 부족할 정도였다,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예수의 기적을 통해 포도주는 다시 공급이 되기 시작했다. 나중 포도주는 이전 포도주와는 양과 질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를 만들고 있었다. 뒤엣 것이 앞엣 것에 비해서 훨씬 더 좋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말해 준 또 하나의 예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되는 일이 없었다. 좋은 것을 가지고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 세월 갈수록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나가는 일은 더 이상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죽어도 완전히 죽은 상태로 보였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야훼의 법을 가지고 있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고 세상에 없는 법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다. 율법은 특권이다. 이 특권이 사람의 특권이 되어서 백성들의 통치의 수단으로 변형이 되었다.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한다. 다시 노아의 홍수다.
율법은 사람을 통제하고 억압하는데 사용하는 Do or Do not이 아니라 율법을 들은 사람 자신에게 적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마음의 법이었다. 그런데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말았다. 율법을 이웃을 비판하는 도구로 써먹었다. 회개가 없었다.
그래서 율법이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율법이 사람들 간에 판단의 시대를 열어버렸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폭발시킨 것 뿐이다. 율법은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는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다. 사람을 헤아리거나 계산하지도 말라고 말했다. 타인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좋아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한 부류들에게 율법은 한없이 멀리 있게 된다. 그래서 위선자들의 세상이 도래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것을 사람의 것으로 변형시킨 것 때문에 정말로 이것은 겁 없이 덤벼드는 이리떼와 같은 무모함에 다름아니다. 하나님께는 덤비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과 예수를 시저에게 넘겨준 가룟 유다와 같은 일을 한 셈이 된다.
비판자의 배후에는 악마의 간사함과 속임수와 사탄의 간교함이 숨어있다. 일상 속에서 비판은 자유다. 나쁘지 않다. 누구나 눈만 뜨면 비판과 판단을 하며 산다. 그러나 예수가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가르치는데, 배우는 자가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오라고 말하라고 한 것이다.
비판이라는 말도 예수의 입에 실리면 생명의 비판으로 바뀐다. 그러나 사탄의 입에 실리면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짐이 되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이 일을 하나님과 사람을 떼놓는 일을 했던 사탄의 하수인들이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하수인들은 스스로가 하수인 인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용서한다.
선지자들과 에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하나로 잇기 위해 세상에 말씀을 던졌다. 그 성령의 말씀을 판단하면 그것은 성령의 모독죄에 해당이 된다. 그래서 예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비판하지 말라! 예수는 말씀은 비판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고 예와 아니오만 있다고 했다. 예수는 예를 말한다. 예수의 듣고 순종하라는 말과 비판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예수는 율법을 생명으로 감싸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의 기름칠을 해 주었다. 이 사람이 예수는 십자가의 죄사함에서 그의 일을 끝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아들로서의 일을 했다. 예수는 비판의 아들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사탄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에게는 비판이 없다. 예수는 생명이고 생명의 아들이다.
비판하지 않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 예수가 비판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비판하고 산다. 왜일까? 비판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비판은 비판을 낳았다. 판단은 판단을 낳았다. 비판을 잘 해야 하나님 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판단하지 않는다. 생명은 그 생명을 나의 생명이 되게 하는데 모든 목표를 둔다. 두 개의 생명 공동체의 생명은 없다. 생명은 단 하나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체적 생명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 비판하지 말라! 나를 판단하는 사람이 타인을 비판할 일이 없는 것이다. 타인 비판을 사람을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재는 것과 같다. 그 어리석은 바보짓은 심판의 이유가 된다.
비판하지 말라!라는 예수의 생명의 말씀은 구약성경에는 없는 말이다. 있을 리가 없다. 생명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어도 기록된 상형문자일 뿐이다. 예수가 말했다. 비판하지 말라! 어떻게 들릴까? 율법으로 들릴까 생명으로 들릴까? 생명으로 들리면 예수를 만난 것이다.
예수는 말씀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말씀의 주인 노릇하는 비판과 판단과 탐욕과 거짓의 영들을 즉각 쫓아낸다. 예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은 말씀이어서 순수 그 자체로 듣는 이들에게 즉시 생명이 되어 버린다.
자신을 잘 헤아리거나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는다. 예수의 생명인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은 너 자신을 헤아려 보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불의에 맞서는 상식적인 국민은 재판을 이긴다. 그러나 생명은 세상을 구원한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생명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주제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토요와이드] 이 대통령, 美빅테크 CEO 회동…여야 내홍 격화 5 [토요와이드] 이 대통령, 美빅테크 CEO 회동…여야 내홍 격화](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07/Lee-0725-120x8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