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큐라고 감독이 지시하면 배우는 대본대로 움직인다. 실수해도 다시 하면 된다. 아뭏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래서 죽은 믿음이다. 믿음이 죽었다라고 할 때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이었을까? 신성을 모독한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은 주께서 주신 것이었으니까.
예수는 듣고 행하라고 했다. 뭘 들으라는 말이냐고 질문한다면 예수는 산상설교를 듣고 행하라고 말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의 산상설교는 모세의 십계명처럼 10개의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위 팔복이란 성경말씀을 예수가 요약한 것이고 9번째 복은 예수 자신의 길을 밝힌 것이고 10 번째에 해당하는 복은 제자들의 순종의 삶에 상급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세종류의 인간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율법의 인간이다. 이들은 쉐마 이스라엘이다. 듣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담과 하와는 듣는 데 실패했다. 듣기는 들었다. 그러나 잘 듣지를 못했다. 율법은 처음부터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고 신법이다. 율법은 들으라는 뜻이다.
그리고 율법의 존재들은 잘 듣는 연습이 잘된 사람들이다. 모세가 말한 쉐마, 그 한마디가 이스라엘의 귀가 된다. 율법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사는 길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율법은 즉각 행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들으라고 했다.
둘째는 복음의 사람이다. 복음의 사람은 예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의 공로를 믿음으로 인해서 영원구원의 자유를 얻는다. 사람들은 본질상 행하기를 좋아한다. 뭔가 해야 살아있음을 감각한다.복음을 만났어도 여전히 복음보다 사람의 뜻과 생각을 앞세우는 사람중심의 사고 방식은 습관처럼 굳어있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사람이 예수의 사람이 되는 데는 예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잘 들어야 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데 있었다면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을 주야로 묵상하는 데 있었다. 꾸준히 예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을 아무도 이길 자가 없다.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믿음을 유지 관리하는 방법이었다. 복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그렇게 친근하게 가까이 대하면 고난 중에도 축복은 늘함께 하게 된다. 축복은 그렇게 받는다. 그 나머지는 모래처럼 모두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즐거움만 남기고 사라진다.
복음의 사람들은 예수의 자유를 값없이 은혜로 받았다. 그리고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올바른 생존법이 아니다. 예수가 십자가로 휘장을 찢고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나게 한 것은 예수의 묵상을 통해서 날마다 살아가라는 의미였다. 생존과 복은 묵상에 있다.
셋째로 예수의 사람이다. 예수의 사람은 예수의 말씀의 사람이다. 예수의 사람들은 오랜 묵상의 사람들이다. 듣고 행하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요한 사도의 결론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대전제로 힌트를 잡는다. 그 힌트는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잘 지키고 간직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을 새가 먹어버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들음과 행함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 사람의 행함은 들음을 간직하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된다. 들음이 곧 행함으로 간다. 사람은 그 들음을 생명처럼 간직하면 된다. 들었던 것을 잘 간수하고 있으면 나와 관계없이 때가 되면 행함으로 나간다.
예를 들면 은행에 예금을 해 놓았다가 그 다음날 모두 인출하면 오히려 손해다. 예금은 오래될수록 돈이 된다. 이와같이 예수의 말씀이 내게 힘이 될 수 있으려면 예수의 말씀을 마음의 은행에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소화가 되어서 나의 에너지가 되면 그 말씀이 일을 한다. 이것이 예수의 설명이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 선악과 때문에 시작된 인간의 타락과 죄에 대하여 스스로가 대책을 내놓는다. 그 대책이 예수의 십자가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로 인하여 인류의 죄가 용서되었는데, 단지 사람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예수를 알되 힘껏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은 계획대로 하셨다. 그 이후에는 사람은 예수의 사람으로 일상을 잘 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고 했다. 예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며 산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예수는 죄를 해결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의 뜻을 말했던 사람이다. 그러면 예수 이전에는 그의 뜻을 말한 선지자가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없었다. 그들은 말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록된 성경은 있었어도 그리고 예언은 있었어도 그 예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다. 성경연구와 성경공부는 반드시 성령의 은혜와 계시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했다. 비 바람과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한 적이 있다. 반석이 흔들리면 집의 주초가 모두 무너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뜻이 와해 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예수는 이를 두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이스라엘의 자랑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믿었다. 그래서 이삭을 나았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 이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바닷가의 모래와도 같이 많아진 소위 믿음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믿음이 없는 모래가 되어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흩어짐을 면치 못했다. 반석에 대한 반대의 비유로서 모래를 사용하시는 예수였다. 예수는 신앙을 모래 신앙과 반석 신앙으로 나누어 설명을 한 적이 있다.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들이 짓는 집이다. 신앙이 이처럼 임시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반석이 아닌 신앙을 모두 모래로 본 것이다. 모래는 흩어진다. 모래는 개인화된 개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 개체들의 행복을 전체의 행복으로 본다. 시중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자기 개발서적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자기에게로 삶의 중심을 돌리도록 격려한다.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의 묵상에 근거했는지를 들여다 볼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주야로 묵상할일이 더 많다는 말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모두 모래로 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수가 둘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 반석이고 그 제자들은 반석들이다. 성경 주석가 였던 메튜 헨리의 지적이며 통찰이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을 모래 신앙으로 분류했느냐이다.
첫째로 거짓 선지자들을 모래라고 불렀다. 선지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말만 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라고 불렀다. 예수는 말하고 그대로 살았다. 말씀의 운동력은 혼과 영과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다. 영혼이 수술이 된 사람은 세상의 무대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한 곳이 가정이고 직장이고 일터의 현장이다. 그리스도인은 현장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두 번째 모래는 주여 주여 라고 말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기도는 많이 하는데 일상을 극복하는 현실감각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 기도는 영적인 것이어서 귀신을 쫓아내며 능력을 행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적인 열매들이 오히려 일상 속에서 있어야되는 믿음의 행위를 약화시키게 될 수 있고 영적인 교만을 부추길 수도 있게 된다. 예수는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귀신추방과 능력행함은 주의 영이 하신 것이다. 마귀와 세상 신들은 그런 일들을 흉내를 내면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챈다. 마귀는 늘 그렇게 사기를 친다. 그러니 모르면 속는 것이고 그리고 그 마귀들은 하나님이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귀신의 일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은 한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참으로 임시적이다. 예수의 사람이 되라. 이것이 복이다.
세 번째 모래들은 말씀대로 산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책이 아니고 말씀을 듣고 간직하라는 책이다. 마음에서 그 말씀이 떠오를 때까지 인내를 하는 사람은 예수의 사람들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모래에서 시작해서 반석이 된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것이다.
오직 너희 안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되고 아름답게 하라.
예수의 천국 복음의 결론은 듣고 행하라는 말이다. 결국 이 일은 성령의 일이다. 예수는 말하기를 내가 이른 말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했다. 영은 들음과 행함을 주도하는 주인이다. 생명은 들음이 곧 행함이 되고 행함 그 자체를 포함하는 말이다. 영은 들음과 행함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이 말은 행하라 라는 말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러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람의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다. 듣고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의 액션 Q?가 액션Q!가 되게하는 좋은 길은 듣고 잘 간직하는 것이 먼저다. 이 비결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의 듣고 행하라!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듣고 교회 밖에서 행하라는 말씀이다. 늘 예수가 고마운 것이다. 예수는 신앙생활을 간편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토요와이드] 이 대통령, 美빅테크 CEO 회동…여야 내홍 격화 5 [토요와이드] 이 대통령, 美빅테크 CEO 회동…여야 내홍 격화](https://kjhou.com/wp-content/uploads/2026/07/Lee-0725-120x8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