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지 않아 좋은 흐린 날이다. 커피 한잔을 들고 현관 문을 연다. 세상의 오늘을 마주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하늘,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새들의 소리, 저 앞에 초록 가득가득한 숲, 간간이 키 큰 야자수나무, 오후 녘이면 줄지어 나타날 염소들의 들꽃 들판, 그 무엇 보다도 앉은키 내 머리 곁에 가장 가까이 나를 반기며 잎새를 흔드는 나무 한 그루! 바로 대한민국 곳곳, 우리집 정원에도 있는 그 백일홍 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직 여린 잎인데 햇볕 쪽부터 송이송이 가지가 무겁게 꽃송이를 피워내기 시작한 이 엄청난 기적을 나는 너무 쉽게 벅차도록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 별보기가 아닌 재택날은 그야말로 마음의 족쇄가 풀어진다. 일단 현관밖에 나앉아야지! 내 얼굴을 쓰다듬는 5월의 바람과 로맨틱한 조우를 해야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한없는 행복을 만끽 해야지! 읽다가 만 공지영 산문도 끝내 야지! 나훈아 유투브도 틀어 봐야지! 아침 과일을 접시가득 들고 와야지!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느리게 느리게 오늘은 게으름을 피워야지! 계획을 잊어버려야지! 시간도 잊어버려야지…!
노동 속박과 시간의 얽매임이 있어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느긋하게, 하는 일 없이, 또는 심심하다는 생각이 내생에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이 채우며 지나온 하루들은 대체 지금 무슨 대단한 성공이나 명성을 내게 남겨주고 있단 말인가?
하루라는 시간속에 일어나는 위대한 역사적 순간들이 증명하듯 하루는 전체이고 전체는 또 하루로 부터이다. 그러니 하루는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위대함이고 순간이고 영원이다. 되돌아보니 이런 하루를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 대로 충실히 또는 틈틈 내가 원하는 사소한 행복대로 살려고 했을 뿐이지 성공하려 유명해지려고는 피하듯 애쓰지 않았다는, 상반되는 때늦은 후회도 가끔은 밀려오는게 사실이다. 지금껏 진행중인 자가당착, 돈이면 거의 대부분이 가능한 멋진 세상! 돈과 성공과 명성이 좋은 걸까? 평범의 위대함을 누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좋은 걸까?
나의 정신세계에 기본으로 깔고 있는 염세주의적 발단은, 처음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 곰곰 생각하게 만들던 시골집 대청마루에 걸린 자개 액자 속 ‘푸쉬킨의 삶’ 이라는 시가, 문학소녀시절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가 세상에 치어 살며 빠져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가 나의 텅 빈 공간 아픈 구석을 차곡차곡 채우며 나를 위로하며 키워냈기 때문이다.
불평도 웃음도 없는 나를 보며, 어쩌다 오신 80노인 친정 엄마는 가끔 말을 걸어오셨다. “얼굴이 왜 그리 어둡나? 뭐 걱정거리가 많으나?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사람마다 다 때가 있다. 때가 되면 다 잘 풀릴 것이다. 세상은 덤벙덤벙 사는 것이 편하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라. ”
수십년이 지나 엄마의 모습마저 희미하게 잊혀지며 사는데, 도반들과 함께 간 문학기행 삼척 죽서루에서 엄마의 그 말이 떠올라 주저 앉았다. 우리와 함께하는 시인 교수님의 설명 중 “ 이 죽서루의 누각을 잘 보아라. 짧은 다리 긴 다리, 길이가 다른 17개의 기둥이 이곳의 터에 맞게 기둥을 달리하여 만든 특이한 건축기법이다. 이렇게 터를 억지로 반반하게 고르지 않고 터에 맞게 기둥의 길이를 달리하여 기초석을 덤벙덤벙 놓았다해서 이 기둥을 ‘덤벙주초’ 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도, 문학도, 사는 것도 이와 같다. ”
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엄마를 불렀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평탄하지 않은 세상, 흔들리는 세상을 반반하게 고르려고 나는 너무 많은 마음의 상처를 품었다. 울퉁불퉁한 현실 중심을 잡으려는 마음의 기둥은 늘 흔들리고 반듯하게 세워지질 않았다. 구불구불한 상대의 마음을 반반하게 펼치려고 부딪치고 갈등하고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이 간단한 삶의 기둥을 나는 거의 평생 편편하게 고르려고 애쓰고 힘들었다.
가장 저렴하나 편리함이 충분한 럭셔리 의자, 싸우스 파드레 해변에 종일 앉아 있어도 불평이 없는 이동용 싸구려 접이의자를 펼쳐 놓고 앉아, 나는 오늘의 이 순간을 벅차도록 감동한다.
신이 내게 선물해준 유일한 하루 오늘!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아무도 모르는 단 하루!
영원의 비밀을 갖고 있는 순간 그리고 이 순간들!
나는 이 순간! 순간만은 덤벙덤벙! 덤벙주초 속으로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초록바람에 마음을 맡긴다. 다른 두세계의 해답에 평생의 미완성인 질문을 던지며 고뇌한 헤세를 잊고, 삶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 끝없는 욕망을 이기려는 의지의 얽매임도 벗어나, 삶은 지독한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안타까운 명제도 5월 하늘로 웃으며 날려 보낸다.
커피잔을 놓고 책을 들었다. 갑자기 번쩍!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공지영! 아이고~ 하나님!!!
“약간 알게된 것을 가지고는 삶은 바뀌지 않는다. 대개는 약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끝에서야 바뀐다.” -공지영 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2024. 5. 흐린 아침시간을 즐기며,
김 엘리사(chalet7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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