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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칼럼 독자기고

[폴윤의 중년 산책] 버리는 연습, 가벼워지는 삶

koreanjournal by koreanjournal
9월 10, 2026
in 독자기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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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Yoon Column 091126

우리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좋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고, 미국은 망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살기는 더 힘들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걱정과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깨닫게 된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넘쳐난다. 우리는 손쉽게 원하는 것을 사고, 고장 나면 고치기보다 새것으로 바꾸며 살아간다.
꼰대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물건 하나하나를 아끼며 살았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통조림 깡통을 깨끗이 씻어 도시락 반찬통으로 사용했고, 양말에 구멍이 나면 기워 신었다. 낡은 물건을 다시 쓰는 것이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비슷한 형편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집은 어떠한가. 어떤 통계를 보면 현대의 가정에는 평균적으로 수만 개, 많게는 10만 개가 넘는 물건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중에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제 마지막으로 사용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물건들이 훨씬 더 많다.
옷장을 한번 열어보자. 몇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언젠가는 다시 유행하겠지.’ ‘살이 다시 빠지면 입어야지.’
그런 작은 희망들이 옷 한 벌 한 벌에 묻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매정하다. 한번 지나간 유행은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젊었을 때의 몸으로 다시 돌아가기보다 조금씩 변해간다. 그렇게 입지 않는 옷들은 몇 년이고 옷장 한구석을 차지한다.
서랍장을 열어보면 더 가관이다. 어디에 사용하는지조차 모르는 작은 공구들, 예전에 사용했던 충전 케이블, 몇 년이나 지난 상비약, 이미 버린 가전제품의 설명서, 몇 년 전의 서류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한 것들이다.
차고나 창고는 더 심하다.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쌓아둔 박스를 하나 열어보면 오래된 비디오테이프가 나오고, 이제는 어디에 연결해야 할지도 모르는 전선들이 나온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우리는 그 물건들을 다시 박스 속에 넣어둔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난다.
그런데 물건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 학교에서 가져온 과제물, 성적표, 운동회 때 받았던 상장과 작은 기념품들…. 특히 아이가 셋인 우리 집에는 이런 물건들이 넘쳐난다.
나는 언젠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으로 세 개의 박스에 나누어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빠, 그거 필요 없어.” 나는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운하다.
부모에게는 보물 같은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오래된 종이와 물건일 뿐이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물건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그 안에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렸던 시간, 젊었던 나의 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이 물건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날 때 청소를 하거나 세차를 한다. 이상하게도 몸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닦고 정리하다 보면 마음도 조금씩 정돈된다. 화가 가라앉고 복잡했던 생각도 차분해진다. 그래서 어느 날 마음먹고 집 안의 물건들을 정리해 버릴 것들을 밖으로 내놓는다.
그런데 잠시 후 아내가 나타난다.
“이건 왜 버려?”
그리고 어느새 내가 내놓은 물건의 절반 이상이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와 있다.
“너무 아깝잖아. 나중에 쓸 수도 있는데….”
그 말을 들으면 나도 웃고 만다.
아마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물건을 붙잡고 살아간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붙잡고 있는 우리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방을 정리할 때였다.
그 방을 정리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물건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물건이 들어 있었다. 침대 밑에도, 화장대 사이에도, 서랍 안에도, 장롱 깊숙한 곳에도 물건들이 가득했다. 어머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재산이었고 추억이었을 것이다.
버리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 ‘이것도 버리면 아깝지.’ ‘이것은 그때 사용했던 물건인데….’

하지만 결국 우리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떠나고 나니 남겨진 물건들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그때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물건을 모으지만, 결국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 사람이 평생 모은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그 사람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추억까지 버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한 추억도 있고,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억이 있다. 모든 추억을 물건으로 보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어쩌면 물건을 놓지 못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집 안의 물건을 하나씩 줄이면 공간이 넓어진다.
공간이 넓어지면 마음도 조금 넓어진다.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고, 청소할 것도 줄어든다. 무엇보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걱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삶도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씩 내려놓아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젊었을 때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이들이 우리의 집을 정리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아이들이 우리가 평생 모아놓은 수많은 물건 앞에서 한숨 쉬기보다는, 우리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엄마, 아빠가 참 잘 살았구나.”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때 남겨야 할 것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을 버리면 공간이 비워진다.
공간을 비우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마음이 가벼워지면 비로소 보인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건이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조금 더 많은 시간이라는 것을.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조금 덜 가지고, 조금 덜 집착하고, 조금 더 사랑하며 살자.
삶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채웠느냐보다, 무엇을 내려놓고도 얼마나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느냐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PaulYoon Column 2

폴윤(Paul Yoon Kirkley)
CEO, Broker, Houskor Realty and Management
28 대 휴스턴 한인회장 역임
2008년 한국문학 등단

Tags: 독자기고시간유행추억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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