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자주 예를 들어 말하지만 믿음과 행함은 달리는 기차의 두 Rails과 같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이다.
기차라는 내 자신이 믿음과 행함이라는 두 레일 위를 달린다.
만일 믿음의 한 레일만 있고 행함이라는 레일이 없다면 나라는 기차는 천국까지 달리지 못하고 전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헬라어 동사 “피스튜오 (Πιστεύω)”는 단순히 사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격적인 의탁과 순종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단어는 행함을 동반한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말씀하지 않는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어디서 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일까?
이 말씀은 종말론적이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마지막 종말에 대한 심판예화는 무수하게 많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달란트 비유에 대한 말씀이 등장한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타국에 간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계산을 한다.
이 주인은 다시 오셔서 계산하실 주님을 상징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 열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더 남겨 네 달란트를 드렸다.
주인의 칭찬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 같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23)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고 받았던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가져왔다.
그러자 주인의 반응이 어땠는가?
주인이 매우 매우 진노한다.
그리고 이렇게 심판을 한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30).
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하실까?
우리 같으면 많이 남긴 사람을 더 칭찬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계산법은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은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을 보신다.
중심이라는 한자어를 충성할 “충”(忠)을 쓴다.
칭찬의 조건은 “맡긴 일에 마음의 중심에 충성을 다 했느냐” 에 대한 것이다.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믿음을 충성스럽게 행동으로 옮겼는가를 보신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받은 것을 그대로 반납했다.
믿음도 행함도 전혀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 무익한 종이라”고 하시며 심판하셨다.
이를 가리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주님은 다시 오셔서 계산하실 텐데 심판대 앞에서 당신은 칭찬을 받을까 아니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까……?
송영일 목사 (Y Edward Song, Th.M, D.Min)
케이티 새생명교회 담임
newlife0688@gmail.com
(832) 205-5578
www.houstonnewli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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