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은 힘들다. 차라리 해체가 쉽다. 국가들은 국기가 있다. 이스라엘의 국기는 역삼각형 두 개를 묶어 놓은 연합을 상징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문양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연합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다윗이 그 일을 성취했기 때문이어서 그 깃발을 다윗의 별이라고도 부른다.
유다와 레위는 예수를 기다리게 하는데 가장 강력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 유다와 레위가 한뜻을 이루었을 때 이스라엘은 나라다운 나라의 힘을 가졌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다윗만큼이나 공명을 울리는 일이었다. 그들의 연합이나 공명은 나사렛 갈릴리 그 변방의 한 마을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모두 연관성을 갖는다. 종교는 인류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만들어진 종교를 대비시키면 큰일 나는 이유가 그래서 그렇다. 종교가 창조주와 피조물을 바꾸면 안된다.
종교들간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한 하나님과 한 성경 아래에 모두가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종교 통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교 혼합을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혼합은 혼잡 그 자체이다. 종교간의 대화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대화는 상대가 파트너가 될 때 가능한 말이다. 그럼 뭘 말하려는 것인가? 종교들간의 연합을 말하려는 것이다. 연합은 묶이는 개념이다.
묶일려면 성경을 경전으로 하나로 묶여야 한다. 만일에 성경경전에 문제가 발견된다면 성경은 그 즉시로 깊이 있는 종교 연합을 만드는 경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성경 안에서 그 누구라도 논리적인 모순을 발견했다면 성경의 권위는 무의미해진다.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면이 있어서도 안된다. 과학은 성경을 입증하는 중요한 도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어떤 것이 있어서도 안된다. 인간 이성역시도 성경의 영역속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과 이성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경전이다.성경의 논리가 믿음을 만들었다. 다른 경전들의 불완전함은 반대로 성경의 완전함이 드러날때 밝혀 진다. 그래도 늦지 않다. 종교 연합은 성경을 경전으로 할때 깊이 있는 종교간의 연합에 도달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인 모임으로 끝난다. 성경의 자신감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았다.
왜 그대로일까? 진리이기도 하겠지만, 명쾌하게도 주 예수의 오심과 사심과 죽음과 부활이 너무도 분명하고 그것이 위의 의심과 질의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대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논리적이고 가장 설득력이 있는 모든 인류의 공통의 가치이자 모든 인생들이 겪고 살아가는 현실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고 누구나 다시 산다면 다 된 것이다.
성경은 그런 한 사람 주 예수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과 문화와 삶의 방식 등 모든 것이 결정된다. 주 예수는 언제나 나를 가지라고 말했다. 성경은 뒤로 읽어도 앞으로 읽어도 주 예수를 말한다. 이런 경전이 있을까? 메시야를 완벽하게 증명한 책이 과연 있는지를 묻는다. 죽음과 부활과 성령에 대한 완벽한 일치를 증명한 책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어떤 종교와 과학과 이성이 과연 대답을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주 예수는 예와 아니오만 하라고 했나보다.
성경은 주 예수의 한 사람의 일생을 꾸미거나 과장하지 아니했다. 다만 표현력이 부족해서 다 기록을 못했을 뿐이다. 위장하지도 아니했다. 그리고 영원무궁한 부활체의 생명까지도 확보하고 있다.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이 말은 자살은 없다는 말이다. 성경이 놀랍게도 역사와 인생 속으로 개입한다는 말은 적어도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추는 생명이 되기 위해서이다. 성경이 없으면 종교연합은 그 자체로 논리모순에 빠진다. 종교연합의 중심에 성경을 두면 종교들의 비교를 통해서 깊이 있는 연합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말하는 성경은 그러므로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 이상 그 보다 더 놀라운 과학이나 논리가 있을까? 늘 종교는 죽음을 끝으로 본다. 그것은 종교는 죽어있기 때문이고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끝나고 말거나 죽음 이후를 상상 속에 던지고 만다. 안타깝다. 그것은 과학도 논리도 철학도 아니고 무책임 그 자체이거나 세상을 결국 속이는 것이 된다. 그 인생과 그런 종교가 얼마나 공허한가! 인생도 이와 같다. 따라서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가진 성경을 연합의 기준으로 가지면 세계의 모든 종교는 한 지붕 아래 연합의 문이 열리게 된다. 성경 아래서 다투자는 말이다.
그런데 종교들 상호 간에 우주의 한 지붕 아래서 모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 하나이다. 모두가 자기들 각각의 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사람들도 각자가 스스로 자신들에 대한 신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신들은 신이라고 말할 어떤 근거 자체가 없다는 것이 정말 심각한 일이다. 그 신들의 이름이 도대체 뭘까?
신들의 이름은 다양성이라는 신들이다. 이것은 흡사 다신교에서 유래한 말이 된다. 한 교실에 모인 많은 학생들의 다양성은 중심이 있을 때 화려하게 빛난다. 다양성이란 여러 가지 상황을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성이 있어야 가족이 되듯이 중심이 있어야 다양성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로켓이 궤도를 이탈하기 위해서 땅을 치며 하늘로 치솟을 때는 나선형의 중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동력을 얻는다. 다양성 이전에 중심이 먼저다. 이시대는 중심을 잃었다. 그래서 다양성 속에 일치라는 구호는 그저 구호에 불과할 뿐이고, 사람은 자신 스스로가 종교에 있는지 성경에 있는지를 분별 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성경이 중심축이며 그 중심의 주인이 성령이다.
그러면 종교상호간에 깊은 연합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메튜 폭스는 말했다. “종교간의 연합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사슬을 풀어 지혜를 모아준다. 이렇게 함께 모여진 지혜는 우리의 집이라 부르는 이 지구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 된다. 전 세계가 하나라는 정신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무한하심을 나타내주는 특징적인 것이다.”
온 지구가 함께 사는 것을 종교간의 연합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모든 세계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중심 그 자체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한 사람은 우주의 어느 한 곳에서 진심으로 가치있는 어떤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갈릴리 시골 외진 곳에서 일하던 주 예수는 더 깊은 종교연합의 중심에 있었다. 세계 3대 종교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소중하다. 그러나 이제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성경이 말한다. 주 예수와 연합된 존재로서의 개인을 성경은 강조한다. 주 예수와 일대일로 연결될 때 그것이 가치다. 그것은 전원을 꼽는 것과 같다. 주 예수께 우리의 모든 죄가 완벽하게 다운로드된다. 그가 죽음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 다시 살아남으로 인해 죽음도 희망으로 변한 것이다. 죽음이 없다. 종교는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주 예수는 영원한 하늘과 땅의 죽음을 하나로 풀었다. 자유다. 모든 사람은 그 때 전부 살아났다. 구원이 시작되었다.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된다.
이제는 우리가 짊어질 차례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시작이었다. 이제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남은 짐을 내 몸에 채워가며 사는 것이다. 종교도 짐이 되었다. 이것이 아름다운 고난이요. 살아나기 위한 짊어짐이다. 주 예수와 완전한 연합을 위해서 뭐라도 짊어지면 영생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된다.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이 문제를 통찰했다. 짊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깊이 있는 종교들간의 연합은 성경과 주 예수의 이해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인생무상이 되거나 공수레 공수거가 된다. 3.1만세운동 105년 째다. 105년 동안 역사의 짐을 짊어지고 오신 조국 대한민국과 함께 만세삼창 외치면서 이민자의 오늘을 또 짊어져 보는 거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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