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집 안의 공기는 금세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바쁘게 움직이던 엄마의 발걸음도 그날만큼은 조심스러웠고, 작은 인기척 하나에도 내가 깰까 봐 숨을 죽이던 기억이 난다. 이불 속에서 열에 들떠 몽롱해진 채로 누워 있으면, 부엌에서 들려오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와 은은한 설탕 냄새가 나를 현실로 붙잡아 두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늘 같은 것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노랗게 빛나던 복숭아 통조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한국에서 과일 통조림이라고는 거의 그것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사과도, 파인애플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 복숭아 통조림은 어딘가 특별한 존재였다. 평소에는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아플 때만 허락되는 달콤함’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몸이 아픈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달콤한 복숭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숟가락으로 복숭아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떠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차갑지도, 너무 달지도 않게 적당히 식힌 그 복숭아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단순한 통조림 과일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엄마의 손길이었고, 걱정이었고, 말없이 전해지는 사랑이었다.
세상에는 ‘컴포트 푸드’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닭고기 수프가 그렇다고 한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갈이 몸과 마음을 함께 녹여준다고. 하지만 나에게 그런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복숭아 통조림을 떠올린다. 뜨겁지도 않은, 오히려 살짝 차가운 그 달콤함이 내게는 가장 큰 위로였다. 아마도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이 단순한 맛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제는 마트에 가면 온갖 종류의 과일 통조림이 넘쳐난다. 신선한 과일도 사계절 내내 쉽게 구할 수 있고, 더 맛있고 더 고급스러운 디저트들도 많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떤 것도 그 시절의 복숭아 통조림을 대신하지 못한다. 가끔 호기심에 같은 제품을 사서 먹어보기도 했지만, 그 맛은 어딘가 비어 있는 듯했다. 분명 같은 단맛인데도, 예전처럼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간단할 것이다. 그때 내가 먹던 것은 단순한 복숭아가 아니라,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픈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던 따뜻한 눈빛, 이마를 짚어보던 손길,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건네지던 한 숟가락. 그 모든 것이 함께 있었기에, 그 복숭아는 특별했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아플 때, 나를 위해 복숭아 통조림을 사다 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약을 챙기고, 스스로 몸을 돌보며 하루를 버텨낸다. 문득 열이 나거나 몸이 축 처지는 날이면, 그 시절이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아무 걱정 없이 아플 수 있었던 시간, 그리고 그 곁에 늘 엄마가 있었던 날들.
엄마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내 이름을 조용히 부르며 방으로 들어오던 모습. 그때의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소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가끔은 일부러 복숭아 통조림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꺼내 먹어본다. 숟가락으로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으면, 잠깐이나마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현실로 돌아오고, 그 자리에 없는 엄마가 더욱 또렷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그 시절의 복숭아 통조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때, 나도 모르게 그 방식이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없이 건네는 작은 배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엄마가 내게 남겨준 것일 테니까.
언젠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프지 않은 날에도 엄마에게 복숭아 통조림을 같이 먹자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달콤함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보다 더 엄마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꼭 전하고 싶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조용히 그 맛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엄마를 부른다. 그때처럼, 아무 말 없이도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 주던 그 눈빛을 그리워하면서.
폴윤(Paul Yoon Kirkley)
CEO, Broker, Houskor Realty and Management
28 대 휴스턴 한인회장 역임
2008년 한국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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