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답이 있다. 사도 베드로가 주 예수와 한몸이 된것은 그가 성령을 받고 난 후부터 였다. 세상이 모두 하나님을 떠났어도 예수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했다. 예수는 아버지와 한 몸이었기 때문이어서 떠날 수가 없었다. 독생자 예수는 그 이름값을 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었다. 아버지도 그 아들만을 둔 것이다. 세상이 그를 아버지에게서 떠나게 하려 했어도 예수는 견디며 기도하며 아버지를 붙잡았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고난의 잔을 마셨다. 아버지도 거기에 함께 계셨고 그 잔을 아들과 함께 마셨다.
아버지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은 똑같았다. 아버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번복할 수가 없었다. 아들도 독생자로서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기도했을 것 같다.
그 기도의 결과는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십자가였으니 이 일을 거듭 생각해 보면 사도들과 바울의 묵상이 너무나도 옳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내려 놓고 아들이 되어 세상 구원의 길을 걸었다. 본체라고 했으니 하나님과 한몸이었다는 것 아닌가!
그 한몸은 결국 한말씀을 말함이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다. 다 같은 한덩어리라는 뜻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한 대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말씀을 벗어날 수 없었고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겟세마네 기도 역시도 말씀을 넘어설 수 없었고 아버지 역시도 독생자를 세상 구원의 제물이 되게 한다는 그의 약속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인류 구원의 드라마가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되어 펼치는 인류구원의 드라마라는 말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다. 아버지는 손이 없다. 아들도 아버지의 도움의 손길을 발견조차 할 수 없었다. 극도의 고통이다. 죽음이 곧 아버지의 뜻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몸이라는 논리아래에 있어야 되는 나라다. 그 약속의 말씀 안에서 아버지도 아들도, 아들도 아버지도 모두 하나가 된다.
사실 아들의 죽음을 먼저 견디지 못한 쪽은 아버지이다.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버지는 없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아버지는 하늘나라가 세상 나라의 권세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현장을 용서할 수 없었을지라도 아버지는 자신의 약속을 버릴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그러면 하늘의 열두 영이라도 불러들여 아들을 죽이는 세상의 잔인함을 심판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려주는 길을 택하기 전에 그 잔인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이 십자가 그 구원의 능력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고난과 죽음은 힘을 잃는다. 그리고 인류구원의 새시대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계된 것이다. 그 영롱하고 찬란한 단어가 거듭남이다.
에덴에서 난동을 부리던 사탄의 계략들과 죽음의 비문은 그날 지워졌고 율법으로 정죄하던 지옥의 문은 닫히게 된 것이다. 참소하고 고발하고 누명을 씌워서라도 진리를 무력화시키려는 사탄의 농간들에 대해 인류가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없다. 잘 견디고 잘 당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아버지의 죽음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은 곧 아들의 죽음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죽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했던 엘리 위젤은 이것을 두고 즉, 아들이 죽어갈 때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어가던 유대인들을 왜 당신은 외면하셨으며 그토록 살려달라고 부르짖던 당신의 백성들의 호소를 왜 모른채 하셨느냐?라는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때 나도 그 수용소 그곳에서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러면 왜 아들은 겟세마네기도를 드렸을까? 아버지의 그 때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은 함께 죽었고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면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해석이 된다. 성경해석은 언제나 성령이 한다. 그래서 성경이고 성경이 진리가 되는 이유다.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시니 그 말씀 한절이 내 맘에 보배 되도다’라고 했다.
사람의 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성령의 의가 의가 된다. 하나님의 그 의가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하고 살게 한다. 그 의가 주 예수그리스도다. 주 예수가 보낸 영이 성령의 의가 된다. 성령의 시대가 2천년도 더 지났다. 앞으로 천년이 더 있다고 해도 성령이 그 나라의 전부인 것이다. 처음부터 성경은 성령의 시대를 말했다.
성령을 받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읽는 일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고 이 일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한다. 사도행전 8장에 나타난 에디오피아 내시는 성경을 읽었으나 무슨 의미인 줄을 몰랐었다. 성령의 사람 빌립이 말씀을 지도해 주었을 때 그는 성령충만을 받았었고 그리고 그 결과로 에티오피아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전체 대륙을 주 예수의 복음으로 깨웠다. 이 일이 이유가 되어 오늘날 아프리카에 수많은 복음의 일이 전개된 것이다.
이틀후면 종려주일이 시작된다.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면서 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온 동네가 경축했다. 우리도 이 경축의 일에 참여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그의 고난의 날에 이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난이 지나면서 고난과 죽음을 물리치는 거룩한 금요일을 맞이하자.
우리의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갈등 속에 있다고 해도 손에 든 연장을 내려놓지 말고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진정한 새날을 경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한 주간이 실질적으로 한해의 진정한 시작이고 살아있는 유월절의 시작이다. 왜 그럴까? 모든 성경은 이 한 주간의 긴장 속에 짜 맞추어 있기 때문이다. 경축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이 한 주간에 모두 달려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거기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다. 바로 거기에 우리도 함께 있으면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도 하나 된다. 이 한 주간의 기도가 그 빛 가운데로 진입하는 좁은 문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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