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해일리의 소설을 영화화 한 뿌리는 우리 젊은 날의 영화 한편이었다. 쿤타킨테가 주인공으로 조상의 뿌리를 찾아가는 줄거리였던 것 같다. 그때는 고교생 관람 불가 영화여서 숨어들어가서 본 영화였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뿌리를 찾아가는 일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뿌리 없는 나무는 죽은 것이다. 세상에 자꾸만 빨려들어가는 인생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가 믿음의 훈련이다. 성경은 그래서 나를 찾으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찾으라고 한 것이다. 나를 찾는 여행은 공허만 남게 된다.
여호와를 찾으라가 구약성경의 주제였고 그 여호와가 예수로 온것이 신약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 새 힘을 얻었다는 말은 원형을 찾았다는 말이고 뿌리를 보았다는 말이다. 응답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도 된다. 성령은 이 일을 돕는 성도들의 스승이다. 천년 된 산삼 한 뿌리면 다 될까? 인생은 될 수 있다.
인생의 소망은 원형을 찾아내는 일이다. 원형을 철학에서는 아르케라고 했고 성경에서는 태초라고 번역을 했다. 인생과 과학과 철학의 모든 해답도 거기에 있다. 거기에 도달 할 때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나온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처음부터 요구했다. 그리고 그 원형을 발견한 사람들이 큰 리더들 이였다.
흔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할 때도 형상을 원형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 예수다. 그 형상을 가진 존재를 성경은 또한 구원된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을 연결짓는 단어가 형상이기 때문에 형상 속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만난다. 이것을 천상의 회의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형상을 만난 증거는 표적과 깨달음이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동시에 기적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라는 싸인이기도 하다.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일까? 성경을 읽고 듣고 깨달으라는 말이다. 그것이 최후의 복이다. 그래서 시편은 말한다.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했다. 때가 악하다 세월을 아끼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깨달음이 성경의 핵심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원형을 발견한다. 태초를 만난다. 세상에는 이런 은혜는 없다. 성령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이 없이는 소경이고 벙어리고 앉은뱅이로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했다. 사람과도 가족간에도 대화가 안된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다. 그 불이 성령이다. 성령은 성경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원형은 또한 근본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용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다. 이때 근본은 누가 읽어도 여호와께 있다는 말이다. 근본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의 몰락이래 그 근본을 잃어 버렸다.
급기야 가만히 있기를 싫어하는 인간은 생각의 최고수준을 종교라고 규정을 하면서 스스로 종교적 동물로 전락했다. 종교는 그래서 땅에서 만들어진 피조물들의 최고의 작품은 되나, 이것은 성경은 아니다. 구원과도 부활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신경쓰면 손해다.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왜냐하면 원형이 없으니 복사본도 있을 수 없고 그러니 만들어 놓은 우상 일 수밖에 없다.
원형은 진리의 다른 말이다. 진리는 하나다. 하나님의 이름도 하나다. 하나인 이 이름을 알게 하고 증명하려고 삼위일체가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한 분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원형은 하나님 한 분이다. 이 지점이 삼위일체의 교리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성령이면 된다.
인생 살이의 소망도 원형을 만나는 데 있다. 원형이 십자가에서 깨어졌다. 박살이 났다. 그래도 원형은 다시 원형으로 돌아왔다. 이 힘이 믿는 우리에게 있다. 그 힘은 원형을 찾는 힘이다. 그러니 망해도 실패해도 우겨쌈을 당해도 일이 꼬이고 엉망이 되어도 실망하지 않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되살아나는 원형의 부활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 이외에 어떤 것은 모두 일회용에 불과하다. 배설물이라고도 했다. 원형은 그러므로 질그릇에 담긴 보배이고 배설물을 알게 하는 진리이고 세상 속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는 어떤 숨겨진 비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보수와 진보를, 진보와 보수를 말한다. 선과 악을 말한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말한다. 이런 주장들 속에는 원형이 없다. 정통성이 없다. 설계도가 없이 집을 짓는 경우다. 그러니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다를 바가 없다. 원형을 찾기 위해서 기도하고 원형을 찾기 위해서 설교도 듣고 원형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주 예수는 말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리고 나는 위에서 왔고 너희는 아래에서 왔다. 원형은 위에 있는 것을 찾는 일이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의 발아래 두었다. 그들의 기준은 죄였다. 예수의 기준은 의다. 죄의 눈에는 죄만 보인다. 그리고 죄는 율법을 선악의 도구로 사용한다. 율법의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율법을 사람의 율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최악이었다.
율법은 선악을 판단하는 세상의 법이 아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지키는 생명의 법이었다. 이것을 바울은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 말했다. 율법이라는 생명의 법이 성령을 만나면 원래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곧 원형이다. 예배는 원형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드리는 성도의 행위다. 원형이 없이 일 만하고 다니는 유랑하는 나그네들이 적지 않다. 슬프게도….
간음한 그 여인이 만난 것은 무죄박면이 아니라 생명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다. 생명은 죄의 영역에 있지 않다. 죄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생명의 목소리 안에는 태초의 음성이 있었다. 그가 죄를 말하면 죄가 물러간다.
물도 천년된 물이 있다면 만병통치약이 된다. 그 음성은 천지를 창조한 음성이다. 그 여인에게 그 소리는 생명의 소리다. 죄라는 말만 들어도 도망가는 죄인들에게는 들릴 리가 없다. 그 여인은 그 순간 주 예수의 어린양처럼 안정과 평안 속에 있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했다. 그리고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다. 여인은 붙들려 와서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완전히 살아났다. 우리는 악마의 손에 붙잡힐 때 도망가지 않는다. 피하지도 않는다. 잠잠히 하나님께 맡기는 평안을 선택한다. 죄가 끝났기 때문이다. 죄가 끝났으면 죽음이 없으니 하는 말이다. 이것이 내가 주는 평안이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 날이었다. 그 여인은 예수가 손가락으로 땅에 쓴 글을 읽고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죄가 영원히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확신했다. 이것이 원형의 힘이다.
여야가 대치한다. 보수와 진보가 다툰다, 옳고 그름을 말한다. 그러나 원형을 잘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시대의 중심에 서 있을 때 세상은 천재지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미국 대법원에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고 한다. 아들이 보내왔다. ‘Justice Scalia’라는 이름의 판사라는데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다. 아마 그는 법의 원형을 찾아 재판을 하는 판사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본다.
세상은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원형을 찾는 사람이 저절로 높임을 받는다. 믿는 우리가 그림자처럼 살아도 예수의 그림자로 살면 가장 좋은 일이다. 예수가 원형이다. 우리의 뿌리다. 그 뿌리는 심한 고통을 당한다. 당해도 뽑히지 않는다. 남는 자의 그루터기로 인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쓰러지지 마라. 세상이 잠시 주는 편안함에 취해서도 안된다. 심한 회의와 공포와 허탈과 죽음이 엄습해도 모든 기도는 원형을 찾아간다.
이근형 목사 (맥알렌제일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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